해평은 경지니 뭐니 하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속인의 눈을 가진 그로서는 방금 양측이 맞붙었을 때 누가 이기고 졌는지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저 길거리 싸움 경험에 비추어 현장에 있는 머릿수를 세어보았을 뿐이다. 좋아, 천기각 사람이 많네.
그래서 결론을 내렸다. 무서워할 필요 없어. 안정적이야.
대마두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향해 입을 열자, 해평은 자연스레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고 여겼다. 마침 잘 됐다. 그도 장리에게 면전에서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코피를 닦아내고 검을 집어 든 뒤, '신통력이 대단하다'라는 글자를 제 것으로 넙죽 인정하며 고개를 돌려 청삼인에게 물었다. "존장, 나가는 문은 어디에 있습니까?"
청삼인은 아주 기이한 눈빛으로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어깨를 토닥였다. "자, 아가. 넌 뒤로 좀 물러서 있거라. 술병 잘 챙기고…… 한 모금은 남겨다오. 다 마시지 말고."
말을 마치며 그가 소매를 가볍게 떨쳐 해평을 제 뒤로 쓸어 넘겼다.
해평은 순간 무게를 잃은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이미 한 장 밖의 수풀 속으로 날아가, 깃털처럼 가볍게 착지했다.
이어서 밤바람이 코와 입으로 밀려들었다. 해평은 장뇌와 녹나무가 뒤섞인 썩은 나무 냄새를 맡았다. 진흙 속에 몇 년은 처박혀 삭힌 듯한 묵직한 냄새였다.
그 투명한 개자가 옮겨졌다.
청삼인은 앞을 가로막고 있던 마른 가지를 들추고 모습을 드러냈다. 먼저 태세를 향해 미소를 짓고는, 천기각 무리를 향해 온화하게 손을 내저었다. "수고했구나. 너희는 먼저 물러가거라."
그가 손을 내젓자 방전을 비롯한 사람들은 마치 커다란 산이 비켜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금빛 눈동자의 태세가 뿜어내던 압박감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 관성 탓에 사람들은 거의 다 비틀거린 뒤에야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방전은 숨을 고르며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내문의 선사께서 오신 것입니까? 어느 사형이신지요?"
"누구도 아니다." 청삼인이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사숙이라 불러야 할 걸."
방전은 짐짓 놀랐다. 현은산은 십 년에 한 번 선문을 연다. 수행하는 이들에게 십 년이란 그저 짧은 폐관 수련 기간에 불과할 터라, 기수마다 항렬을 따지기에는 지나치게 번잡했다. 그래서 내문이든 외문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같은 항렬로 칭했다. '사형'이나 '사저'는 낯선 동문과 마주쳤을 때 폭넓게 쓰는 존칭이었다.
오직 승령 경지의 봉주만이 종파를 열고 제자를 거둘 자격이 있었으며 비로소 '사숙'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역대 선사들은 모두 새 제자를 거두고자 하는 봉주가 문하의 축기 제자를 파견하지 않았던가? 대충 넘기려는 곳에서는 아예 연차가 찬 개규기 수사를 지목해 보내기도 했다. 이분은 대체 어느 봉주이시기에 친히 속세로 내려오셨단 말인가?
방전이 미처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수의 차림의 태세가 금빛 눈동자를 들어 이 선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발밑에 있는 용 그림자는 마치 땅을 뚫고 솟구쳐올라 사람을 물어뜯으려는 듯 갈수록 난폭해졌지만 어투만은 여전히 예의가 발랐다.
"현은산이 나를 주시할 줄은 진작에 알았지만, 설마 당신을 기꺼이 내보낼 줄은 몰랐습니다." 태세가 말했다. "다행입니다. 지정재支静斋…… 지 장군."
이 말이 나오는 순간 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얼어붙었다.
방전은 방금 읍하느라 모았던 손을 내리는 것도 잊었고, 나무 구덩이에 있던 해평은 술병을 놓칠 뻔했다.
무식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해세자마저도 본조本朝의 연호는 기껏해야 다섯 개 정도 말할까 말까 했고, 그마저도 순서가 맞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조차도 '지정재' 석 자의 무게만큼은 알고 있었다.
'정재靜齋'는 자이고, 이 지 장군의 이름은 '수修'였다.
이백여 년 전, 인종 연간의 일이다. 대완 남쪽에는 '합阖'이라는 이웃 나라가 있었다. 그곳의 국교인 난창검파澜沧剑派의 장문이 주화입마에 빠지면서 전란을 일으켰고 남합이 중원으로 북진하면서 대완이 그 첫 번째 표적이 되었다.
난창검파는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저지르며 선과 속의 구분을 무너뜨리고 여러 명의 현문 고수를 군에 파견하는 한편 비법을 써서 현은산과 금평의 연락을 차단했다. 남합 대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와 하룻밤 만에 금평을 압박했고 수도는 순식간에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당시 지 대수大帅와 가문의 장수들은 모두 변방에 있었다. 각지의 주둔군이 회군하여 구원하기에는 이미 늦은 데다 현은산은 소식조차 받지 못했다. 금평 성내에는 삼만의 금군과 천기각에 상주하는 개규 경지의 수사 수십 명…… 그리고 마침 경성에 남아 요양 중이던 지씨 가문의 어린 아들뿐이었다.
이 소장군은 위기 속에서 명을 받들어 궁중과 왕후백관의 집에 있는 모든 선기를 징발했다. 그는 성 안의 명문법진과 힘을 합쳐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하루 밤낮을 버티며 금평을 지켜냈다. 천기각의 결사대 여덟 명이 포위망을 뚫고 현은산에 소식을 전할 때까지 버텨낸 것이다.
후에 여러 대문파가 연합해 난창을 토벌하면서 난창검파는 멸문당했고, 오대 선문은 사대 선문이 되었다. 남합 역시 이를 계기로 몰락의 길을 걸어 끝내 나라가 무너졌다. 마기가 흩어지지 않고 백 년 동안 쇠락을 거듭한 끝에 옛 남합의 영토는 지금의 '백란지'가 되었다.
지수는 이 한 번의 전투로 이름을 떨쳤고 훗날 표기대장군에 오르며 대완의 무곡성*이 되었다.
*무곡성(武曲星): 북두칠성의 여섯 번째 별인 무곡은 강직함, 결단력, 압도적인 무용(武勇)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수의 별'.
안타깝게도 하늘이 영재를 질투한 것인지, 지 장군은 서른에 갓 접어들어 중병을 앓았다. 그해는 본래 현은산의 대선년이 아니었으나 현은산의 장각章珏 장로는 장성이 지는 꼴을 차마 볼 수 없어 이례적으로 친히 하산하여 그를 거두어 관문제자*로 삼았다. 또 수십 년이 흘러 속세의 친척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났고 지 장군은 선문에 은둔하여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인종부터 지금까지 벌써 여섯 왕조가 지났다. 지 장군은 이미 속세의 사람이 아니지만 그의 혁혁한 전공은 모두 전기소설의 명편이 되었다. 그는 대완의 모든 소년들이 숭배하던 우상이었다. 길거리에서 막대기를 들고 전쟁놀이를 하던 꼬마치고 '지 장군'을 하겠다고 다투다 친구와 얼굴 붉히지 않은 이가 어디 있었겠는가?
*마지막 제자
그런데 지금 이 전설이 그들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살아 있는 채로!
게다가 대장군 시절 일 년 봉록이 얼마였는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다!
"백여 년 동안 문밖을 나서지 않았는데 각하께서 나를 알아보시다니." 지수가 웃으며 말했다. "실례지만, 우리 사이에 무슨 인연이라도 있는지 여쭙겠습니다."
"그런 건 아닙니다." 태세는 그와 말을 섞으며 자신을 가리키는 호칭마저 겸손해졌다. "제가 일찍이 속세를 유람할 때 운 좋게 장군을 뵌 적이 있습니다. 장군의 공은 천추에 빛나고, 지 가문 군대의 풍채는 사람을 감복시키기에 충분했지요."
지수가 겸손하게 대답했다. "과찬이십니다."
이 한 명의 선인과 한 명의 마인은 누가 더 예의를 많이 차리나 내기라도 하듯, 분위기가 일순간 새해 인사라도 나누는 것처럼 화기애애해졌다.
이윽고 태세가 우호적으로 제안했다. "저는 당신과 적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지 장군께서 현은산에서 금평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으니, 오늘 밤엔 우리 서로 한 발씩 물러나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수가 공수하며 답했다. "배려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사문을 위해 심부름하는 것이니 고생일 것 없지요."
태세의 안색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저는 그저 용맥의 작은 부분을 빌리고 싶을 뿐입니다. 사후에 원래대로 복구해 놓을 것을 보장하며, 절대 국운과 사직에 해를 끼치지 않겠다 약속드리지요. 그런 다음 우리는 각자의 사람을 데리고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수의 얼굴에 감도는 미소는 마치 금평성의 철 지난 봄바람을 품은 듯했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아이고, 그건 아마 좀 곤란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귀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땅 위의 용 그림자가 한발 먼저 목을 쳐들었다.
거의 동시에 하늘에서 떨어지던 무수한 물방울이 지수의 손바닥 안으로 모여들더니 거대한 빙검으로 얼어붙어 금빛 눈동자의 산송장 머리를 베었다.
태세는 순식간에 열 걸음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 반경 백 장 안의 마른 가지마다 그 빙검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서리꽃이 피었다!
태세가 두 손을 펼치자 발밑의 용 그림자가 소리 없이 포효했다.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리며 지 장군의 손에 있던 빙검이 무수한 파편으로 산산조각 나며 그의 머리카락 한 가닥을 잘라냈다.
갑작스레 불어닥친 삭풍이 해평의 뼛속까지 시리게 훑고 지나갔다. "에—— 에취!"
이 우렁찬 재채기 소리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장리와 방전은 그를 발견하고 동시에 소리를 냈다.
"네 녀석, 여기 있었군."
"네가 왜 여기 있어!"
해평은 몸에 붙은 풀 부스러기와 얼음 조각을 털어내며 나무 구덩이에서 기어 나왔다.
코를 한 번 훌쩍이더니 그가 중얼거렸다. "질문 한 번 참. 그걸 말하자면 사연이 아주 길다고."
"한가하게 잡담할 때가 아니다." 지수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방전을 향해 하는 말이었다. "조금 물러서서, 나 대신 저 꼬마 친구를 좀 돌봐주어라."
이때 지수든 태세든 두 사람의 움직임은 이미 개규기 수사들이 포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 선인과 마인이 오가는 곳마다 촘촘하게 내리던 봄비가 수시로 얼음 칼날로 얼어붙었다. 얇디얇은 빗물이 얼어붙은 얼음 칼날은 놀랍게도 쇠를 진흙처럼 벨 만큼 예리했다. 바위에 부딪혀 튕겨 나온 파편 하나가 부적을 두른 한 남의의 허리띠를 단번에 끊어버렸다!
인간행주와 사수들은 어쩔 수 없이 집단 후퇴하며 대능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방전의 뒤에 있던 남의 하나가 흥분하여 말했다. "지 사숙께서 친히 오셨으니 이제 저희가 나설 일은 없겠군요. 도통, 그물망을 빠져나간 사수들이 모두 여기 모여 있는데, 이참에 잡아들일까요?"
말과 함께 검을 치켜들고 앞으로 돌진하려 하자 방전이 눈을 번뜩이며 날쌔게 흥분한 남의를 낚아채어, 경솔한 부하를 도로 끌어왔다. "죽고 싶어 환장했느냐, 비켜라!"
그의 '비켜라'는 천지를 진동시키는 용의 울음소리에 묻혀버렸다. 땅 위를 헤엄치던 용의 그림자가 실체로 변해 대지를 박차고 솟구쳐 올랐는데, 마치 칠흑 같은 화염이었다!
화염 깊숙한 곳에서 흑룡이 한 쌍의 금빛 눈동자를 번쩍 떴다. 밤하늘 속에서 영혼을 뒤흔들 만큼 밝게 빛나는 그것은 마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두 개의 업화 같았다.
하늘 가득 흩뿌려진 얼음 칼날들은 큰 불 속으로 던져진 가랑비처럼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금평 전체가 그 용의 포효에 벌벌 떨었고, 남성묘에서는 불길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전은 허공을 움켜쥐어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해평을 '끌어' 당기고는, 다른 한 손으로 화승총처럼 생긴 쇠붙이를 꺼내 들었다. 그 '화승총'의 방아쇠를 당기자 빽빽한 부적이 뿜어져 나왔다.
화승총은 쏜살같이 발사되어 눈 깜짝할 사이에 겹겹의 부적 그물을 형성했다. 그러나 그 부적들은 공기처럼 연약하여 바람에 닿기 무섭게 타들어 갔다. 날아가는 속도가 파괴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방전은 현란하게 하늘 가득 부적을 뿌려대며 사람들을 호위해 재빠르게 후퇴했다. 전광석화의 속도로 수 장 밖까지 퇴각하는 사이, 그의 앞섶은 이미 공장 산성 폐수에 갓 담갔다 뺀 것처럼 까맣게 타들어 가 너덜너덜해졌다!
하마터면 뛰쳐나갈 뻔했던 남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중얼거렸다. "이건…… 대체 어느 정도의 수위란 말입니까?"
다른 남의가 질겁하며 말했다. "지 사숙께서는 승령 봉주이신데! 설마 저 자가 승령이란 말입니까?"
"헛소리 마라! 이 세상에 승령 사수는 없다!"
방 도통에게 거칠게 멱살을 잡힌 채 질질 끌려가던 해평이 간신히 목을 빼내며 외쳤다. "저기 어르신들…… 켁켁…… '승령'이고 나발이고, 이 이상 구경하다간 우리가 먼저 승천하겠습니다. 감당이 안 되면 좀 멀찍이 숨을 수 없나요?"
그때, 용의 그림자가 무언가를 소환하기라도 하듯 기괴한 저음의 울음소리를 냈다. 주변 산등성이가 '쩌저적' 소리를 내며 뒤틀렸고 땅속에서 무언가가 흙을 뚫고 솟구쳐 오르려 하고 있었다.
지수의 모습이 흑룡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내려앉았다. 그의 얼굴에 어리던 온화하고 점잖은 미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지 장군, 당신이 비록 불세출의 천재라 할지라도 승령에 오른 지 고작 백 년이나 되었습니까? 제가 이번에 감히 이리 온 것은 당연히 의지할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이미 승령 원만에 이르렀고, '선태*'까지 단 한 걸음만 남겨두고 있지요. 하나의 거대한 경지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아득한 법이니 당신은 저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태세의 목소리가 흑룡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용의 얼굴은 악귀 같았으나 그의 말투는 여전히 부드럽고 정중했다.
*선태(蝉蜕): 매미가 허물을 벗듯 속세를 벗어나 신선이 되는 의미. 매미(선, 蝉)는 중국 문화, 선협물에서 변화와 초월의 상징으로 특별한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태세에서는 개규-축기-승령-선태-월만 순서.
방금까지 세상에 '승령 사수'가 있니 없니 언쟁을 벌이던 인간행주들은 아연실색했다.
만약 '승령'이 '구천의 구름 위*'에 있는 인간이라면, '선태'는 단언컨대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선태' 경지의 대능은 한겨울에 우레를 울리고 한여름에 눈을 내리며 푸른 바다를 뽕나무 밭으로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민간에서 절기마다 제사를 지내는 수많은 '신명'은 사실 선태 선배들인 경우가 많았다.
*구소운상
"내가 금평의 용맥을 강제로 빼앗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렇게 우회하는 이유는 그저 무고한 백성을 해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본래 청룡탑을 조용히 비집고 들어가 한 줄기 용맥만 취해서 떠나려 했지. 어찌하여 여러분은 기어코 내가 곱게 가져갈 수 없도록 몰아붙이는 것인지. 만약 억지로 금평의 용맥을 뽑아낸다면 반드시 강남에 지진이 일어날 터. 선존들이여, 성 안팎 수백만 백성을 돌보지 않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능양하 서쪽 황궁 내원의 귀인들은 어찌할 셈인가? 그들마저 내버려 둘 작정인가?"
거기까지 말한 뒤, 그 거대한 용의 머리가 다시 멀리 있는 방전을 향했다. "방 도통. 상의 좀 하지. 대국을 위해 도통께서 청룡칠탑의 봉인을 잠시 풀어주어 내가 용맥을 조금만 빌릴 수 있도록 해주면 안 되겠나? 그러면 우리 중 누구도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을 텐데. 어떠한가?"
방전이 냉소하며 대답했다. "각하께선 사체로 되살아나서도 우국충정을 잃지 않으시니 참으로 감복스럽습니다."
태세는 그의 빈정거림에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수행하는 이라면 모름지기 천하를 우선으로 삼아야 하지."
방전은 금평성에서 숨 막힐 정도로 답답했다. 하루 종일 속내를 감추고 위선을 떨어야 했지만, 오직 사수들 앞에서만큼은 길들여지지 않은 거친 본성을 드러낼 수 있었다. 당장 손뼉을 치며 웃었다. "각하께선 사마외도이시면서도 이런 숭고한 마음을 품고 계시다니. 좋은 말씀입니다. 수행하는 이라면 모름지기 천하를 우선시해야지. 기왕 그리 말씀하셨으니, 지금 당장 자결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인간 세상에서 소란을 피우지 않는 것이야말로 제세구민이지요. 돌아가면 내 반드시 각하의 공덕을 선문에 상세히 고하여, 안락향에 사당을 하나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금평 백성이 반드시 은혜에 감사하며 해마다 향을 올릴 테니, 이 어찌 모두가 기뻐할 일 아니겠습니까?"
용의 머리가 가련하다는 듯 그를 한 번 흘겨보더니, 이 함부로 입을 놀리는 개규기의 하찮은 미물과는 같은 급으로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듯 태연히 지수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지 장군, 어떻게 보십니까?"
"요즘 인간행주의 젊은이들은 참으로 입이 매섭군요. 저는 저만큼 말을 잘하지 못합니다." 지수 역시 아주 차분하게 대답했다. "오늘 용맥을 취할 수 있을지는 이 녀석에게 물어보십시오."
말을 하며 그가 손을 뻗어 허공을 어루만지자 중검 한 자루가 손안에 떨어졌다.
어느 남의가 놀라 외쳤다. "조정照庭!"
'조정', 바로 그 옛날 전설 속에서 수만 명의 난창 요사와 남합 대군을 막아냈던 절세의 명검이었다.
금평 전체를 통틀어 아이들이 주워다 이 '조정' 흉내를 내 보지 않은 나뭇가지는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흑룡은 조정에 아주 격렬하게 반응했다. 거의 마주치자마자 처절한 용의 포효가 천지를 뒤흔들었고, 안락향 상공을 덮고 있던 먹구름이 순식간에 짙어졌다.
방전은 냅다 해평의 머리를 짓누름과 동시에 손을 들어 평범하게 생긴 검은 우산을 펼쳐 두 사람을 함께 가렸다. 우산이 펼쳐지는 순간 무수한 전광이 쏟아져 내렸다.
해평의 귓속에 날카로운 통증이 치솟았고 일순간 청력을 잃었다.
한동안 우산 밖의 모든 것…… 쏟아지는 폭우마저도 번개에 삼켜져 버렸다. 그 두 명의 선인과 마인은 커녕, 지척에 있는 방전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해평은 마치 자신이 작디작은 개미 한 마리가 되어, 천지를 뒤덮는 대홍수 속에서 언제 뒤집힐지 모르는 나뭇잎 한 장 아래에 죽기 살기로 웅크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온갖 상념이 날아가 버리고 마음속엔 방향조차 종잡을 수 없는 막막함이 피어올랐다.
뇌우가 안락향 전체를 쟁기질하듯 휩쓸고 지나갔다. 지수가 맹렬하게 조정을 바닥에 꽂아 넣자, 기이하게 진동하던 지면이 순식간에 멈춰 섰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의 온몸이 흑룡에게 휘말려 들어갔다!
흑룡은 구렁이처럼 지수를 감아쥐며 주변의 날카로운 검기와 힘을 겨루었다. 푸른 도포의 사내와 그의 손에 들린 조정을 탐욕스럽게 바라보며 사람과 검을 한꺼번에 통째로 삼켜버리려는 듯했다.
귀가 멀고 눈이 어두워진 해평은 간신히 오감을 조금 회복했다. 그리고 그 안하무인 격이던 방 도통이 제 머리를 짓누르고 있는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이어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방전의 손에 들려 있던 우산의 천이 한가운데서 두 조각으로 찢어졌고 우산대마저 그대로 꺾였다.
방전은 방금 태세와 마주쳤을 때 이미 부상을 입었던 터라, 이때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발을 헛디뎠다.
해평이 서둘러 그를 부축했다. 방전은 그의 몸 위로 쓰러지며 뜻하지 않게 도련님 몸에서 나는 부귀한 훈의향*을 코끝 가득 들이마시고 고개를 돌려 재채기를 했다.
그 재채기가 숨겨진 상처를 건드리는 바람에 한 모금의 피가 뒤따라 쏟아져 나왔다.
*훈의향(薰衣香): 옷에 연기를 쐬어 스며들게 하는 고급 향을 통칭한다. 귀족들이 썼던 훈의향은 주로 침향, 백단향, 사향, 정향 등 최고급 향료들을 배합해서 만듦.
"……"
큰일 났다. 천기각의 도통 대인을 향에 절여 피를 토하게 만들다니!
계속 부축해야 할지 아니면 방 도통을 위해 한쪽으로 밀쳐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해평은 실낱같은 목소리를 들었다. "너…… 네가 왜 여기에 있어?"
해평은 방 도통을 부축한 채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상복 차림의 장리가 있었다.
방금 전 그 뇌우 속에서, 천기각 반선이든 사수든 할 것 없이 모두 제각각 피할 곳을 찾았다. 장리는 어딘가 하나씩 모자란 동료들에게 이끌려 관짝 판자 아래로 들어갔다.
뇌우가 막 지나가자마자 그녀는 발버둥 치며 관 밑에서 기어 나왔다.
기이한 기운에 목이 메고 속이 타들어 가는 듯, 당장 따져 묻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었다.
"네가 왜 여기에…… 네가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장리가 마장에라도 씐 듯 초점 없는 눈빛으로 해평을 노려보았다. "안 돼, 이러면 안 되는데……."
이 순간 모두가 엉망진창이었지만 오직 해평만이 방전의 보호를 받아 머리카락 한 올 상하지 않았다. 무지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그답게 당당하게 맞받아쳤다. "그럼 내가 어디 있어야 하는데? 이 미복 잠행이라도 하신 신령께서, 어디 한 수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급격한 노화 탓에 장리의 안와골이 다소 함몰된 듯했다. 눈두덩이는 더 크고 깊어져 있었고 그 안에는 혼탁한 눈동자 한 쌍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가 횡설수설하며 중얼거렸다. "넌 분명 천기각으로 끌려갔잖아. 어째서 그 생진옥을 넘기지 않은 거야? 왜 오늘 밤 천기각에 머물지 않은 거야?"
숲속에 이렇게 오래 있었으니, 해평은 바보가 아닌 이상 그 말을 알아들었다. 장리는 틀림없이 그놈의 구혼향인가 뭔가를 평소 식사에 섞어 귀신도 모르게 그를 인간 향로로 절여버린 게 틀림없었다. 그는 본래 방탕한 밤고양이였으니 한밤중에 벌레 알에 감염된 불운한 놈들과 마주치면 자연히 그들을 향에 중독시켜 죽게 만들었다. 죽은 모습이 귀신 신부로 끌려간 피해자들과 매우 흡사했기에, 사람들은 선입견을 품고 이들이 음친에 끌려간 것이라 단정 지었던 것이다.
장리는 그가 천기각으로 끌려간 뒤, 몸에 지닌 주머니에 생진옥이 들어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자신 역시 '신부' 후보라 착각하고 혼비백산하여 그 돌을 바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리고는 천기각에 틀어박혀 보호를 구하리라 예상했다.
그렇게 되면, 인간행주들은 틀림없이 사람을 보내 장리를 조사할 터였다. 하지만 고작 가희 하나를 상대하는 데 오는 사람은 한두 명을 넘지 않을 테고, 그들은 늙은 마부가 고의로 남긴 단서를 따라 이곳까지 찾아왔다가 사수들의 함정에 제 발로 걸려들어 제물로 붙잡힐 것이 뻔했다. 아마 그때쯤 피를 흘리는 건 장리가 아니었을 테지.
밤이 깊어 '향로'가 벌레 알 숙주들 틈에 섞여 들어가면, 감화간에 적힌 혈서에 겁을 먹고 천기각으로 도망쳐 바닥에 진을 치고 있던 그 겁쟁이들을 한꺼번에 모두 중독시켜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금평에는 강시들이 들끓을 테고, 인간행주들은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여 필시 허둥지둥할 터. 그 틈을 타 성 안의 동당들은 용맥을 훔쳐 내기가 아주 수월해졌을 것이다!
생각 한번 빌어먹을만큼 치밀하네. 하지만 나한테 이런 광대 역할을 떠넘기려면 사전에 내 허락부터 받았어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아직 안 물어본 게 있는데!" 해평이 버럭 화를 냈다. "대체 날 뭘로 본 거야? 내가 그깟 깨진 돌멩이 하나에 쫄아서 천기각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을 진옥에 갇히게 할 놈 같아? 네가 뭔데 나한테 오줌이나 지리면서 살려달라고 비는 그따위 겁쟁이 역할을 맡기는 거냐고! 그딴 게 나라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해평은 죽은 자에 대한 예의조차 잊어버리고 홧김에 내뱉었다. "그건 왕큰개나 할 짓이지!"
장리는 한 글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몹시 절망한 상태였다. 계획이 실패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진작부터 몸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고, 순조롭게 천기각 반선들을 잡아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녀의 평생은 소원이 언제나 허사로 돌아가고 기대는 반드시 배신당하는 것이었으며, 예외는 없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운명을 인정했다.
구혼향과 벌레 알은 모두 취류화에 탄 것이었다. 그녀는 구혼향을 탄 술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해평에게 건넸다. 그것은 이승에서 그녀가 마지막으로 품었던 미련이었다. 그 미련이 산산조각 났을 때 그녀는 비로소 '원만'해질 수 있었다.
해평이 천기각으로 '순순히'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 일은 절대 실패할 일 없으리라 확신했다. 그저 한 푼어치도 안 되는 '물건'인 그녀 자신이 다시 한 번 버려지기만을 기다렸다. 남들은 미색을 보아서라도 그녀를 달래주려 했건만, 저 피도 눈물도 없는 도련님은 그녀의 미색조차 눈에 차지 않았으니 무슨 미련이 남았겠는가?
그러나 하필 이번에는 그 '절대 실패할 리 없는' 사람이 뜻밖에도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
그들의 모든 계획을 수포로 만들어 버렸다.
하필이면 오직 이번 한 번.
마치 그녀의 운명이 언제나 바라는 것과는 반대로 흘러가도록 정해진 것처럼…… 그 어떤 소원이든간에 말이다.
머리가 하얗게 센 장리가 처절하게 소리질렀다. "하지만 날 대하는 네 정은 이슬보다도 얄팍했잖아!"
해평 이 망할 자식은 쥐뿔도 이해하지 못한 채, 여전히 이 여자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여기며 당당하게 받아쳤다.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 게 곧 내가 겁쟁이란 뜻이야? 네가 무슨 사람 담력 시험하는 난장강이라도 돼?"
방전은 할 말을 잃었다. "……"
하늘에선 선인과 마인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고 금평성 전체가 언제 폐허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때가 되면 여기 있는 이들 모두 예외 없이 뼛가루가 될 판에, 이 두 사람은 그 와중에도 짬을 내서 말싸움을 벌이고 있다니!
게다가 완전히 동문서답이지 않은가!
작가의 말
연휴가 끝났습니다. TAT
최대한 써보겠습니다만, 연재가 어려울 경우에는 업데이트 당일 자정 전까지 휴재 공지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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