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검은 고양이가 기지개를 켜더니 장왕의 무릎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고양이는 몹시 심심하다는 듯 그의 몸 위를 오가며 이리저리 밟았다. 채 숨기지 않은 발톱이 장왕의 비단 도포를 긁어 실밥을 사방으로 뜯어놓았으며 온몸에 고양이 털까지 잔뜩 묻혀놓았다.
장왕은 녀석에게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성을 내기는커녕 오히려 응석을 받아주며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더 밟게 내버려 두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드물게도 고양이를 어르고 달랠 기분이 아니었다.
자명종이 세 번 울렸고, 누군가 밖에서 방문을 두드렸다.
장왕이 번쩍 눈을 치켜떴다. "백령白令, 들어와라."
그러자 빗장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도, 문틈으로 종이 한 장이 부름에 응하듯 스르륵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방 안으로 들어온 그 '종이'는 한 번 파르르 떨리며 펼쳐지더니 몹시 마른 사내의 모습으로 변하여 바닥에 내려섰다.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제법 단정한 사내였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에게 어떤 얼굴이었는지 기억에 남지 않는 인상이었다. 심지어 눈동자 색조차 남들보다 삼 푼 정도 옅었다.
소리 없이 방 안으로 들어선 그의 발걸음은 고양이보다도 가벼웠다.
장왕부의 암위*수령 백령은 놀랍게도 수사였다.
그것도 세상에 정체를 드러낸 적 없는!
*암위(暗卫):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비밀리에 움직이는 호위 인물
백령이 예를 올렸다. "왕야."
장왕이 손을 내저었다. "예의 차릴 것 없다. 상황은?"
백령이 보고했다. "지진은 멎었습니다. 일곱 개의 청룡탑에 주사대진*이 매복되어 있었던 터라, 오늘 밤 탑을 훔치러 갔던 자들은 단 한 명도 도망치지 못했습니다. 오경** 전후에 성 밖으로 나갔던 천기각 우부도통이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왔는데……"
*주사(诛邪): 사악함을 베다
**오경(五更): 동트기 전인 새벽 3시에서 새벽 5시 사이
장왕은 그가 자질구레한 것들을 늘어놓는 것을 진득하게 들어줄 인내심이 없어 곧바로 말을 잘랐다. "해사용 그 사고뭉치는 어떻게 되었느냐?"
백령이 답했다. "세자께선 무사하십니다. 왕야께선 마음 놓으십시오. 선사의 차를 타고 함께 돌아오셨습니다."
장왕은 그제야 숨을 내쉬며 겉으로는 알아채기 힘들 만큼 미세하게 긴장을 풀었다.
자명종은 쉴 새 없이 째깍거렸고, 그는 거친 도기 찻잔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다시금 팔풍부동*의 꼿꼿한 삼전하로 돌아왔다. "그럼 됐다. ……그래, 녀석이 정말 혼자 성 밖으로 뛰쳐나나간 거냐?"
*팔풍부동(八风不动): 불교 용어로, 여덟 가지 세속의 바람(이익, 쇠퇴, 훼방, 명예, 칭찬, 조롱, 고통, 즐거움)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
"선사의 수위가 워낙 높아 소인이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백령이 말했다. "구체적인 경위는 알지 못하나 세자께서는 천기각에서 차를 내어 보내 돌려보냈고 영녕후부의 남의들도 정중히 물러났으니 나쁜 일은 아닌 듯합니다."
장왕이 차갑게 분부했다. "문지기와 시위들에게 일러라. 그 녀석이 또 오겠다고 까불거든 누구도 들이지 말고 곧장 포박해서 후야께 보내라고. 몇 차례 더 호되게 두들겨 패지 않고서는 가르칠 수가 없겠다."
백령의 눈가에 웃음이 번졌다. "예."
장왕은 그제야 다시 물었다. "현은산의 선사가 왔다고? 예년 같으면 선사가 오기 수개월 전부터 소문이 샜을 텐데, 올해는 대체 어느 봉주 쪽에서 왔길래 이토록 철저히 숨겼단 말이냐?"
"이번에 오신 분은…… 속하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백령이 한 걸음 다가와 장왕의 귓가에 이름 하나를 속삭였다.
이름을 들은 장왕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분이?"
"예." 백령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승령봉주가 친히 하산하다니 백 년에 한 번 있을까 한 일입니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으나, 아마도 이번에 난을 일으킨 사수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장왕은 검은 고양이를 토닥여 혼자 놀라고 물려둔 뒤 뒷짐을 지고 창가로 걸어갔다.
뜰 안의 파초 잎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잎사귀에 맺힌 빗물은 온통 흙탕물투성이였는데, 금평 상공을 떠돌던 매연과 먼지들을 모두 씻어 내린 모양이었다. 이렇게 한바탕 씻어내고 나면 내일은 안개가 좀 걷힐지 모를 일이었다.
범인들이 피워 올린 시커먼 연기와 탁한 기운은 결국 다시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남들은 모르는 일이었지만 황족 자제들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으로 훤히 아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 옛날 남쪽의 난창 사변 때, 대완의 용맥이 한 번 끊어진 적이 있었다. 당시 현은산 사명司命대장로 장각선존이 친히 속세로 내려와 용맥을 보수한 덕분에 간신히 국운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것이 수천 년 역사상 현은산에서 유일하게 속세에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선태' 선존의 행보였다.
보수한 용맥은 본래의 것만 못하여 십 년마다 한 번씩 보강을 해 주어야 했기에 현은산에서 선사를 하산시켜 용맥을 보강하는 김에 겸사겸사 대선을 주관하게 한 것이었다. 용맥을 보강하려면 천시를 맞춰야 했으므로 매번 날짜가 달랐고, 그 때문에 대선 일정도 덩달아 신비로워진 것이다.
대선이 열리는 해가 돌아올 때마다 용맥은 유독 취약해졌다. 사수들이 이 시기를 노려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감행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올해 '그분'이 하산한 것은 과연 용맥을 노린 사수가 유독 막강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현은산이 은연중에 자미성이 빛을 잃고 군왕이 부덕하여 용맥이 흔들린다는 뜻을 내비친 것인가?
"왕자겸에게 전해라. 이번에 우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장왕이 잠시 헤아린 뒤 입을 열었다. "승령은 어디까지나 승령이다. 그분의 눈앞에서 섣불리 잔머리 굴리려 들지 말라 해라."
백령이 명을 받들고는 덧붙여 말했다. "이번 사수들의 난동은 내막이 불분명하고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 기이한 구석투성이입니다. 듣자 하니 천기각에서 어젯밤 총서에 머물렀던 공자들을 그리 정중하게 대하지 않았다더군요. 대선 명단에 아마도 큰 변동이 생길 듯싶습니다. 만약 세자께서 뜻밖의 조화를 얻어 선사에게 이름이 눈에 띄었다면, 혹시……"
장왕이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자 백령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장왕의 긴 소매가 창살을 스치고 지나가자, 나무 테두리 위로 은빛 명문이 번쩍였다.
그것은 나무 들보에 새겨진 '삼등 명문'이었다. 이 명문이 새겨지면 방 안은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서늘하여 얼음이나 숯불이 필요 없었고, 세 번의 대지진도 거뜬히 버텨낼 수 있었다. 설령 밖에서 천지가 개벽하고 땅이 쪼개진다 해도 청룡탑이 무너질 정도의 재앙만 아니라면 왕부는 철옹성처럼 견고할 수 있었다.
개규기의 반선들은 명문을 새겨넣을 능력이 없었다. 이 명문들은 축기 이상의 선존, 즉 현은산 내문 수사의 손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었다.
대완의 규정에 따르면, 조정 내에서 군왕 이상의 작위를 가졌거나 큰 공을 세워 특별한 영예를 누리는 자만이 삼등 명문을 사용할 자격이 주어졌다.
선문에서 어쩌다 한두 줄 하사하는 명문조차 범인들에게는 한평생 갈구하는 지고한 영광이었다.
하지만 선문은 또 얼마나 아득히 멀단 말인가.
설령 징선첩을 손에 쥐고 '잠수사潜修寺'에 들어가 일 년간 수행할 기회를 얻는다 해도, 운 좋게 영규*가 열려 내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는 봉황의 깃털이나 기린의 뿔처럼 희귀했다. 십 년에 한 번 열리는 대선에서 내문의 눈에 드는 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영규(灵窍): 인간의 몸에 있는 '영적인 구멍' 혹은 '혈도'를 뜻하는데 영기를 흡수하고 도를 깨닫기 위해선 영규가 열려야 함. 이 단계가 개규.
검은 고양이가 창턱으로 훌쩍 뛰어오르더니 풍성한 꼬리를 빳빳하게 세우고는 주인을 향해 길게 '야옹'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건방진 태도로 고개를 치켜들며 쓰다듬어 달라고 보챘다. 주영은 고양이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백옥처럼 온화한 가면을 얼굴에 덮어쓰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당화 선생의 칠순 잔치가 머지않았으니 두둑한 예물을 준비해라. 그리고 사람을 보내 천기각 조 위장에게 말을 전해라. 영녕후부 세자의 언행이 방탕하고 무례하여 혹여 선사의 눈에 거슬릴까 두려우니 가능하다면 어르신께서 각별히 신경 써주십사 하고. 만약 선사께서 입선 제자 명단을 새로 작정하시거든 그 녀석의 이름은 후보 명단에서 빼달라고 하여라."
왕손들조차 피 터지게 싸워가며 빼앗으려 드는 것이 바로 현은산의 징선첩이거늘, 제 발로 후보 명단에서 이름을 빼달라는 소리는 백령조차 처음 듣는 일이라 순간 멈칫했다.
장왕이 나직하게 말했다. "금평에 있으면 녀석에게 삼재구난이 닥쳐도 내가 어떻게든 막아줄 수 있지만, 현문에 발을 들이면 그땐 내 손이 미치지 못한다. 내게 형제라곤 그 녀석 하나뿐인데, 녀석이 만약……"
그는 여기까지 말하다가 자신이 '형제라곤 그 녀석 하나뿐'이라고 내뱉은 것이 큰 실언임을 깨달았다. 그렇게 말하면 궁궐 안의 수많은 진짜 용의 피를 받고 태어난 용자황손들은 대체 어떤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인가? 그는 재빨리 입을 다물고 뒷말인 '녀석이 만약 십 년만 늦게 태어났더라도'라는 문장을 꿀꺽 삼켰다. 잠시 말을 멈추었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식구 일은 제 식구가 제일 잘 아는 법이다. 그 녀석은 결코 훌륭한 재목이 못 되며 후부에 녀석이 쓸 젓가락 한 벌 더 얹는다고 가세가 기우는 것도 아니니, 굳이 감당하지도 못할 '대조화'를 탐낼 필요 없다. 외숙께서도 속으로 다 생각이 있으실 테니 너는 그저 명한 대로만 처리하거라."
다음 날 아침, 선사가 입경했다는 소식에 과연 도성이 발칵 뒤집혔다.
간밤에 있었던 모든 소동에 대한 해답이 순식간에 풀렸다. 다름 아닌 지 장군께서 행차하신 게 아닌가!
지 장군께서 속세로 강림하셨으니 성묘의 종이 저절로 울리고 용맥이 놀라 날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구룡주에 새겨진 진짜 용이 새끼줄처럼 배배 꼬인다 해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시정잡배들의 입방아를 타고 온갖 소문들이 봄비 이후의 죽순처럼 솟아났다. 그날 밤 두 눈으로 똑똑히 상서로운 구름을 보았다는 사람부터, 선사의 차가 자기네 집 뒷문을 지나가자 십 년 동안 말라 죽어 있던 고목에서 새싹이 돋았다는 사람, 심지어 평복 차림의 선사와 마주쳐 선향만 맡고도 묵은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는 사람까지 등장했다!
신선을 마주쳤다는 장소도 훈둔 노점, 다과점, 찻집, 술집, 두부 가게 등 곳곳을 망라했으니…… 이쯤 되니 지 장군은 만병통치약인 데다 며칠 만에 금평의 온갖 식당을 섭렵한 대식가나 다름없었다.
떠들썩한 소문이 퍼지자 용맥이 까닭 없이 요동쳤던 일은 도리어 묻혀 버렸다. 금평성의 야간 통행금지도 흐지부지 풀렸고 성내의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노랫소리는 성 밖에서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증기기관의 요란한 기계음과 다시금 장단을 맞추었다.
화방 나루터에서 노래를 부르던 시체들 역시 원수에게 독살당한 것으로 뭉뚱그려졌고, 독살 사건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취류화는 완전히 문을 닫았다. 감화회의 화려함은 마치 한바탕 불꽃놀이 같았다.
꽃이 피었을 땐 강물이 붉게 물들 정도로 화려하게 타올랐지만, 불꽃이 사그라진 뒤엔 한 줌의 재만 남았을 뿐이다.
"감화간을 받았던 자들도 돌아가서는 입조심을 하더군요." 방전이 후보 제자 명단을 살펴보고 있는 지수에게 말했다. 그는 잠시 단어를 고르더니 이내 조심스레 물었다. "사숙. 저들이 온 천하에 입방아를 찧으며 터무니없는 헛소문을 퍼뜨리게 내버려 두시면 사숙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실은, 저 백여 개의 식당을 돌며 밥을 먹었다는 소문의 절반 이상은 지정재 본인이 직접 흘린 것이었다.
"백성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폐하께도 심려를 끼칠 용맥의 동요를 소문내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나." 지수가 말했다. "명성이라…… 옥구슬처럼 흠집 하나 없는 명성을 가져서 뭘 하겠느냐?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 소리라도 청아하더냐?"
그는 손에 작은 낭호필*을 든 채, 말하면서도 붓대로 명단을 하나하나 짚어 내려갔다. 붓끝이 누군가의 이름에 닿을 때마다 종이 위로는 그 사람의 생김새, 족보, 그리고 악행을 저지른 적이 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저절로 떠올랐다.
*낭호(狼毫): 족제비 털로 만든 붓.
방전이 슬쩍 보니 지 장군의 붓대가 '조문굉'이라는 이름에 닿자 아주 반듯하게 생긴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인물화 아래로는 이 자가 영안 조씨 가문의 적계 자제이며, 나이는 몇이고, 부모는 누구이며, 모 선존의 몇 대손인지 등을 낱낱이 밝히는 작은 글씨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맨 마지막 줄에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술에 취해 서출 누이동생을 겁탈하여 욕보였으나, 여인은 감히 입을 열지 못함.'
방전은 할 말을 잃었다. "……"
이건 또 무슨 개호로새끼인가?
지 장군은 무장 출신임에도 오랜 세월 수행을 한 탓인지 성정이 매우 온화하여 겉보기엔 그저 평범한 서생 같았다. 전설 속 대영웅의 면모나 선문 승령봉주가 뿜어낼 법한 위압감과는 영 딴판이었다.
방전은 이 순간에 이르러서야 어째서 승령이 '구소운상인'으로 불리는지 그 이유를 뼛속 깊이 깨달았다.
방 도통이 천기각에서 구른 세월만 족히 백 년이었다. 외지 공무로 자리를 비워 마주치지 못했던 해를 제외하고도 족히 대여섯 명의 선사를 접대해 본 경험이 있었다. 그중에는 축기 후기, 나아가 축기 대원만 경지에 이른 자도 있었으나 이런 신통한 수법은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인간이 평생 저지른 공과 선악, 아무리 은밀하고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본인만 아는' 비밀일지라도 지 장군 앞에서는 모두 투명하게 발가벗겨졌다. 그가 알고자 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지 장군은 마치 세상 만물을 남김없이 굽어살피는 '하늘'이자 '땅' 그 자체 같았다.
지수는 '조문굉'의 이름을 미련 없이 지워버리더니 물었다. "천기각 내에 조씨 가문 사람이 있느냐?"
"있습니다." 방전이 조예를 대신해 낯이 뜨거워져 대답했다. "당장 조 사제에게 일러 알아서 처리하라고 전하겠습니다."
차 한 잔 마실 사이도 안 되어 지 장군은 본래의 후보 명단 중 절반 가까이를 지워버렸다. "예비 인원이 더 있느냐?"
"사숙." 옆에서 지켜보던 방전조차 간담이 서늘해져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 사숙께서 보시기에도 참으로…… 온갖 오물과 찌꺼기들이 득실거리는 온상 같지 않습니까?"
"몇몇은 확실히 꼴이 말이 아니군." 지수가 아무렇지 않게 객관적인 사실만을 담담히 논했다. "문제가 있는 자들은 전부 걸러냈다. 다행히 모두 세가 자제들이니 조사하기도 찾기도 어렵진 않겠지. 마땅히 책임질 자가 나서서 하나하나 처리하면 될 일이야."
말을 마친 지수가 고개를 들었다. 길고 수려한 그의 봉안은 마치 잔잔한 호수 같았다. 미추를 한 치의 편견 없이 비추면서도 놀라거나 분노하는 기색이 전혀 없어, 잠시 쳐다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절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방전은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예. 동료들이 아마 예비 명단을 따로 정리해 두었을 터이니, 제가 찾아오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예가 예비 명단을 올렸으나 그는 감히 말을 보태지 못하고 잿빛이 된 얼굴로 집에 돌아가 불초한 자손을 단죄하러 떠났다.
지수는 붓으로 이리저리 표시를 해가며 금세 서른 명의 최종 명단을 작성해 방전에게 건넸다. "더 볼 필요 없다. 올해는 이정도로 하자꾸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의 한 명이 헐레벌떡 들어와 보고했다. "사숙, 도통. 그날 청룡탑을 기습했던 사수들이 체포된 직후 모두 자결했습니다. 안락향에 있던 놈들 중 현장에서 즉사하지 않은 몇몇도 수혼을 채 한 번도 견디지 못해, 고작 단편적인 정보만 건졌을 뿐입니다. 이놈들은 평소 '전생목*'으로 만든 선기를 써서 연락을 주고받았고 서로 진짜 이름은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놈들이 참배하던 사신의 이름은 '태세'라 하더군요. 구체적인 상황은 이미 책자로 묶어 정리해 두었으니 사숙께서 한 번 살펴봐 주십시오."
*전생(转生): '다른 것으로 다시 태어나다', 환생의 의미.
"수고했다." 지수가 책자를 받아 들더니 꼼꼼히 훑어보았다. "이번엔 내가 판단을 잘못한 탓이다. 이 사수가 승령 원만에 이르렀을 줄은 미처 짐작하지 못했지. 괜히 자네들까지 끌어들여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구나."
방전이 조심스레 물었다. "사숙, 사수들은 축기의 관문조차 넘기 힘들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승령 사수가 존재할 수 있는 겁니까? 그리고……"
"음?"
방전은 잠시 머뭇거렸다. 자신이 이렇게 내뱉는 것이 너무 건방져 보이지 않을까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지 장군의 눈빛은 묘하게도 '내 앞에서는 무슨 말이든 해도 괜찮다. 내가 다 포용해 주마'라는 안정감을 주었기에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 사수가 좀 약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제가 목이 빠지도록 올려봐야 놈의 발밑 연기나 겨우 볼까 말까 한 수준이지만 그래도…… 제가 상상했던 '반보선태' 경지 치고는 좀…… 걸맞지 않게 격이 떨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방전은 말을 마치고 지수가 비웃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지 장군은 웃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말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이자의 몸에는 의문투성이인 구석이 한두 개가 아니지. 사문에서조차 현재 파악한 바가 많지 않다. 하지만 걱정 말아라. 이런 사수는 천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이변이고, 세상에 나타나면 큰 동정이 있기 마련이니 사문에서 미리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방전은 즉시 지수가 더 이상 말을 얹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현문에는 숱한 금기가 존재해 윗사람이 먼저 말해주지 않는 한 함부로 캐물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눈치 있게 입을 다물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지수는 오히려 미소를 머금고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문창. 그날 안락향 숲에서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너는 이미 영골이 이루어지고 도심이 굳건히 주조되었지? 이미 원만에 이르렀으니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겠느냐?"
방전은 번쩍 눈을 크게 뜨더니 저도 모르게 마른입술을 핥았다.
지수가 말을 이었다. "축기에 오르려면 내문으로 들어와야 해. 내가 비록 제자를 거두지는 않지만 네 몫의 '접인령*' 한 장 정도는 챙겨줄 수 있지."
축기를 넘어서면 진정으로 속세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장생(长生)을 얻게 된다. 수사치고 이 제안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수많은 인간행주들이 평생을 바쳐도 얻지 못하는 꿈이었다.
*접인령(接引令): 직 역하면 '인도하여 맞아들이는 패'로, 내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일종의 통행패를 뜻한다.
방전 역시 사람이었다.
그가 입을 벙긋거리며 얼굴에 뚜렷한 갈등이 스쳤다. 그러나 결국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꿀꺽 삼켰다. 지수의 온화한 시선을 마주한 채 그가 고개를 숙였다. "사숙. 내문에 들어가게 되면…… 더 이상 '인간행주'로 남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지수가 말했다. "그게 규율이니까."
방전은 그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지 장군 역시 무한한 인내심을 가진 사람처럼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오랜 침묵 끝에 방전이 아주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배려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사숙. 사실 제가 천기각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이 수행의 길을 걷고 또 걸어 끝까지 닿아보겠다는 거창한 뜻 같은 건 없었습니다. 그저 남들보다 재주를 조금 더 익혀 인간 세상의 문지기 개가 되어 태평성대를 지켜내고 싶었을 뿐입니다. 한데 이제 와서 선문에 오르고 다신 하산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아무래도……"
지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무언가를 배신하는 기분이다."
방전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아…… 그…… 제가 그……"
"어려워할 것 없다." 지수가 손을 내저었다. 그의 얼굴에 어렴풋한 그리움이 떠올랐다. "너는 내 옛 벗과 참 닮았구나. 이렇게 하자. 접인령은 네게 남겨둘테니 내문에 들고 싶은 날이 오거든 언제든 내게 서신을 보내거라."
방전은 어지러운 머리로 생각했다. '나 같은 자가 대체 무슨 덕으로.'
그래서 더더욱 안절부절못했다.
다행히 바로 그때 다른 남의 한 명이 뛰어 들어왔다. "사숙, 도통. 아뢰올 말씀이 있습니다. 그 '명령螟蛉'은 어찌 처리할까요?"
방전은 구세주라도 만난 듯 거의 목이 빠질 정도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명령'?"
"아." 지수가 멈칫했다. "깜빡 잊었구나. 아직 살아 있느냐?"
잠시 후 방전은 해평을 안락향 깊숙한 곳으로 유인했던 그 작은 괴물과 마주했다.
그 작은 괴물은 얼핏 보기에 큰 머리에 앙상한 목을 가진 평범한 아이처럼 보였다. 바들바들 떨며 천기각 총서로 끌려온 녀석은 저 멀리서 '벽장청' 빛깔의 장포를 입은 지수를 보자마자 필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며 겁에 질린 어린 짐승처럼 몸을 잔뜩 웅크렸다.
방전이 녀석의 입을 억지로 벌리자 쇠못을 박아놓은 듯한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그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허, '명령반우'?"
*반우(半偶): '우(偶)'는 목각인형이나 허수아비 같은 형상을 뜻하는 한자. 반우는 반은 사람, 반은 인형인 존재.
임산부는 사수의 사악한 기운에 가장 쉽게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사수가 머물다 간 자리 근처에서 태어난 아기들은 기형으로 태어나기 십상이었다. 가난한 백성들은 기형아를 돌볼 여력이 없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어떤 사수들은 이 버려진 기형아들을 주워다 사술로 반인반우로 만들어 억지로 목숨을 이어 붙였다. 놈들은 이 아이들을 곁에 두고 노예나 애완동물처럼 부리며, 그럴듯하게 '명령*'이라 부르곤 했다.
*명령(螟蛉)에는 "양자(養子, 의붓아들)"라는 뜻이 있습니다. -작가주
"나를 좀 무서워하는 것 같구나." 지수는 다가가지 않고 방전에게 말했다. "영석을 갖고 있느냐? 한 알 먹여 주어라."
방전은 "아." 하고는 새끼손톱만 한 '남옥' 영석 구슬 한 알을 꺼냈다. 돌을 꺼내자마자 작은 괴물이 다급하게 그것을 낚아채더니 허겁지겁 삼켜버렸다.
"이렇게까지 굶었다니. 대체 얼마나 안 먹인 것인지 모르겠구나." 지수가 한숨을 쉬었다. "명령반우는 산 사람이 아니라서 평범한 음식이나 물은 먹지 못하고 영석을 삼켜야만 연명할 수 있다. 대체 어느 사수가 이 아이를 만든 것이냐?"
"예." 보고를 올린 남의가 대답했다. "녀석의 원래 주인은 이미 안락향 숲에서 죽었습니다."
"영석을 먹어치운다고? 차라리 금괴를 삼키고 살지 그러냐?" 방전이 혀를 내둘렀다. "어차피 사수의 물건이니 이참에 처리하는 게 어떻습니까."
꼬마 명령은 이 사내가 더 무서웠는지 화들짝 놀라 남의의 등 뒤로 숨어버렸다.
"문창, 아이를 놀리지 말게. 반우는 정제기법 때문에 지능이 보통 아이에 미치지 못할 뿐이지 사람 말을 얼추 알아들을 수 있어." 지 장군이 말했다. "아직 영지도 채 열리지 않은 어린 것에게 정과 사가 무슨 상관이겠느냐. 내가 잠수사로 데려가마. 대가 자제들 중에 혹시라도 거두어 키울 자가 있는지 찾아보겠다."
"그 말씀을 하시니 말입니다." 방전은 무언가 '떠오른' 척하며 남은 예비 제자 명단을 뒤적였다. "어라? 그 해사용은 어찌하여 예비 명단에 없는 겁니까?"
"안락향에 있던…… 자네만큼이나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그 어린 친구 말인가?"
"영녕후 세자이자 궁내 황귀비의 조카입니다. 대명*은 해평인데, 이치대로라면 마땅히……" 방전이 몹시 부자연스럽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둘러댔다. "아이고, 이거 참 이상하네. 해씨 가문의 후손이 워낙 적다 보니 수하가 실수로 명단에서 빠뜨린 모양입니다."
*대명(大名): 집에서 어릴 때 부르는 아명(小名)이나 성인이 되어 부르는 자(字)가 아닌, 호적이나 족보에 오르는 '정식 본명(관명)'을 뜻한다.
지수가 빙긋 웃었다. 방전이 아주 다분히 고의적으로 이러고 있다는 것을 훤히 꿰뚫어 보면서도 굳이 들추어내지 않았다. 그가 종이 위에 해평의 이름을 적었다. 해 도련님의 그 빼어나고 돋보이는 얼굴이 종이 위로 떠올랐다.
해평의 '죄목'은 그야말로 대나무를 다 베어 기록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모월 모일, 모모, 모모모 등과 작당하여 한 가희를 위해 병부시랑의 아들을 몽둥이로 기습 구타함. 모월 모일, 술에 취해 춘향루에서 말도 안되는 논쟁을 벌이며 기방 주인을 울림. 모월 모일, 모모의 말에 설사약을 먹임. 모월 모일, 장군왕부에서 힘 없는 고양이를 괴롭혀 기어이 나무 위로 쫓아냄…….
방전은 말문이 막혔다. "……"
이 골칫덩어리 꼬마는 정말 보물 같은 녀석이다. 심심풀이로는 최고군.
지수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리더니 최종 선발 명단에 해평의 이름을 보태어 넣었다. "그럼 그 한 명을 추가하겠다."
작가의 말
이 파트가 끝났습니다. 내일 하루는 휴재예요,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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