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세의 인신人身이 용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아직 제대로 살아나지 못한 시퍼런 송장 얼굴을 드러낸 채 용의 뒤에 선 그는, 온몸이 빗물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요란한 빗소리 속에서 말했다. "지 장군. 장군께서 평범한 인간이셨을 적에 대완의 백성을 위해 싸우겠노라 말씀하신 적이 있으시지요. 하오나 지금 신산으로 귀의하시더니 저희를 모두 잊으신 것입니까?"
지 장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정이 이미 떨리기 시작했고, 흑룡의 일부분이 다시 지면으로 떨어져 '그림자'로 되돌아갔다. 그 '그림자'는 오수처럼 지수를 향해 '흘러'가더니, 대지와 맞닿은 조정의 검신을 휘감았다.
처음에 검신에 닿은 검은 그림자는 마치 맹렬한 불꽃에 끼얹어진 찬물처럼 순식간에 뜨겁게 타서 사라졌다. 그러나 용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검은 그림자가 점점 많아지자 놀랍게도 조정의 검광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방전이 막 입을 열려던 참에 목구멍에 미처 다 뱉어내지 못한 피가 걸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자, 팔꿈치로 해평을 툭 쳤다. 해평은 어찌 된 영문인지 그 뜻을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마침 장리에게 쏘아붙이고도 기세가 남아 있던 터라 고개를 돌려 대마두까지 싸잡아 욕하기 시작했다. "대완에 '백성'이 있는 건 맞는데, 각하께선 대체 어느 성씨입니까? 부모 성을 따르시는지, 아니면 대충 훔쳐 온 인피에 맞춰 아무 성이나 주워 쓰시는 건지……"*
*百姓(bǎixìng)은 "백성(일반 백성)"이라는 뜻이지만 글자 그대로는 "백 가지 성(姓)"이라는 뜻이기도 한 것을 이용한 언어유희
태세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흑룡이 곧바로 꼬리를 내리쳤다.
그가 한숨을 쉬었다. "지 장군, 저희를 먼저 저버리신 것은 장군이십니다."
흑룡은 조정을 칭칭 감은 채 검신을 따라 계속해서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내 지면 위로 기름이 번지듯 거대한 용의 그림자가 스며 나왔다.
금평성 밖의 잔잔하던 운하에 거센 파도가 일었다. 마치 물속으로 거대한 용이 스쳐 지나가기라도 한 듯 십 장 높이의 증기 화물선이 큰 물결에 부딪혀 뒤집힐 뻔했다. 남산의 산등성이에서 '쩌적' 하는 소리가 나더니 벼랑 가의 수많은 고목이 뿌리째 뽑혀 나갔다. 만년 동안 티끌 하나 앉지 않던 조성로*의 명문이 홀연히 빛을 잃었고, 눈처럼 흰 석재 위로 빗물에 튄 진흙 자국이 남았다. 금평 단계방의 틈새 없이 꽉 맞물려 있던 청석판 위에 뱀 같은 균열이 생겨나더니 동에서 서로 뻗어나가며 곧장 황성까지 이어져 푸른 벽돌 위에 조각된 화사한 꽃무늬를 두 동강으로 씹어 삼켰다.
흠천감钦天监의 지진을 감지하는 금두꺼비가 구슬을 뱉어내며 경종을 울렸다.
지진이다!
*순례길
용의 꼬리가 내리쳐질 때 방전은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한 손으로는 해평을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피를 찍어 바닥에 부적을 그렸다. "간다!"
용의 꼬리가 굉음과 함께 떨어졌지만 두 사람은 제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다.
해평은 방 도통이 벽을 뚫고 지나가는 것을 본 적은 있었지만, 이번에는 친히 '토둔*'을 경험하게 되었다.
자신이 마치 한 장의 종이가 된 것 같았다. 짧은 순간 오감의 기능이 마비되고 온몸이 얇은 종이 조각으로 쪼그라들었다. 대략 한 호흡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해평은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종이가 되었던 몸이 그 숨결로 가득 채워지듯 다시 펼쳐지며 본래의 부피를 되찾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이미 삼 장 밖으로 이동해 있었고, 방전에 의해 비석 안에서 끌어내어 진 상태였다.
*土遁, 땅으로 숨는 도술
신기하다!
해평은 방금 전 하마터면 흙 속에 파묻혀 안락향의 숱한 미인들과 함께 영원한 안식을 취할 뻔했다는 사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신이 나서 방전을 바라보며 방 도통이 또다시 욕을 퍼부으라고 지시하기만을 기다렸다.
한 번 더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쳐다보니 방전의 안색이 심상치 않게 무거웠다.
조정은 더 이상 지면의 진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한 가닥 금빛 선이 흙을 뚫고 솟아올라 하늘로 치솟으려 했으나, 중간에 흑룡이 입을 벌려 고스란히 빨아들여 버렸다. 금선은 태세의 몸으로 끌려가 그의 옷자락 위를 이리저리 누비며 눈 깜짝할 사이에 평범한 인간은 알아볼 수 없는 천서 같은 '명문铭文'을 엮어냈다.
방전이 기침을 두 번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이거 영 좋지 않군."
해평이 물었다. "뭐가요?"
방전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반인반귀의 사수가 승령 원만에 이르렀다는 것을 그도 선뜻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저 마두가 참으로 조정의 검기 아래에서도 용맥을 강탈해 내는 모습을 보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는 물처럼 가라앉은 서늘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금평 쪽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피어오른 것인지 모를 검은 연기 탓에 금평의 하늘마저 탁해지고 있었다.
태세의 말은 하나도 맞지 않았다. 설령 금평에 지진이 일어나 땅이 뒤집힌다 한들, 단계방의 대단하신 분들은 고작해야 가슴 한 번 쓸어내리는 데 그칠 것이다. 능양하 서쪽 일대 전체를 통틀어 사람을 깔아뭉갤 만큼 높은 누각은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집집마다 천재지변을 피할 수 있는 거대한 화원과 고도로 훈련된 호위 무사들이 있는데, 그들이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죽어 나가는 것은 그저 좁은 골목이나 공장 판잣집에 간신히 몸을 뉘인 채 살아가는 사람들뿐일 것이다…… 저 마두는 필시 부귀영화를 구경도 못 해본 촌구석 출신의 마두가 분명했다.
"존장, 저희도 좀 더 멀리 피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 단계방 출신의 도련님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어르신 부하들은 다 도망갔는데요."
"넌 그놈들을 따라가라." 방전은 해평의 손을 쳐내더니 침착하게 손을 뻗어 정강이뼈 부근에서 장궁 한 자루를 뽑아냈다. "널 챙길 여유가 없다. 알아서 숨거라."
해평이 멈칫했다. 방 도통이 활을 들고 곧장 앞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해평은 '승령'이니 뭐니 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었지만, 남의들의 반응을 보고 이미 눈치를 챈 상태였다. 지 장군과 태세가 싸우는 상황에서는 천기각의 어르신들조차 물러서서 피하는 것 외엔 도리가 없었다. 비유하자면 용과 범이 싸울 때 집고양이나 똥개는 구경조차 삼가고 최대한 빨리 도망치는 게 상책인 것과 같았다. 무심코 소리라도 냈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워 토둔으로 도망쳐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방 도통이라는 이 '똥개'는 무슨 귀신이 씌었는지, 거대한 용의 그림자 가장자리로 힘겹게 다가가 화살도 얹지 않은 장궁의 시위를 매섭게 당겼다. 빈 활시위 중앙에 소용돌이가 일었다. 방전의 손등에 핏대가 무섭게 솟구쳤다. 그는 파르르 떨리는 손을 억지로 억눌렀다. 부서진 나뭇잎, 모래와 자갈, 빗방울…… 모든 것이 소용돌이에 말려 들어갔다.
'반보선태에 이른 사수'라니. 듣기만 해도 터무니없는 소리였고 선문조차 예상하지 못한 변수일 터였다. 지 장군에게 원군이 있었다면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천기각에는 개규 수사들뿐이었다. 방전은 속으로 상황을 가늠했다. 금평 전체를 통틀어 선사를 제외하면, 있으나 마나 한 자신의 수위가 가장 높았다.
'죽은 말도 산 말처럼 치료해 보자.' 방전은 속으로 생각했다. '기껏해야 순직이지. 이 몸이 한 번 걸어본다.'
장궁의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자, 본래 텅 비어 있던 활시위 위로 금홍색 화살 한 발이 피어났다. 전설 속 불사조의 깃털 같은 화살깃이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눈부시게 타올랐다.
'우웅' 하는 길고 무거운 울림과 함께, 화살이 유성처럼 솟구쳐 탁한 빗줄기를 찢었다!
그러나 그토록 영혼을 뒤흔드는 화살은 요동치는 검은 그림자에 부딪히자 깊은 연못에 빠진 미약한 불씨처럼 가라앉으며 해평이 미처 눈을 뜨기도 전에 흔적 없이 소멸해 버렸다.
해평은 그것이 어떤 활인지 몰랐지만, 날아간 화살이 마치 방 도통의 일부분 같다고 느꼈다. 화살이 사라짐과 동시에 방전의 몸이 한 번 휘청였고 얼굴의 혈색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오직 야생늑대 같은 두 눈동자의 불꽃만이 꺼지지 않은 채, 반석처럼 굳건하게 태세의 몸에 얽힌 명문의 금선을 응시하며 두 번째 화살을 걸었다.
방 도통의 호위가 사라졌으니, 해평은 자신이 마땅히 고개를 돌려 달아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도망칠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 방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피비린내 나는 풍우 속에서 해평은 수 장 너머로 방전이 정위전해*하듯, 갈수록 불빛이 희미해져 가는 화살을 헛되이 쏘아 올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정위전해(精卫填海)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필사적으로 매달림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창백해진 방전의 입가에 핏자국이 비쳤지만, 화살은 털끝만큼의 오차도 없이 집요하게 금선을 뒤쫓았다. 비록 한 걸음 한 걸음 무겁게 옮기더라도 그는 기어이 앞으로 다가갔다.
열여섯 번째 화살이 검은 그림자에 꽂히는 찰나, 놀랍게도 금선이 타격을 입고 한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바로 그 한순간, 옷자락을 타고 '기어오르던' 금선의 한 토막을 조정이 다시 거두어들였고, 지 장군과 마두는 또다시 팽팽한 교착 상태에 빠졌다.
방전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그의 무릎이 채 땅에 닿기도 전에, 누군가 뒤에서 그를 불쑥 낚아채어 삼 척 넘게 끌어당겼다. 작두날 같은 매서운 칼바람이 그의 신발 밑창을 스치며 떨어져 원래 서 있던 자리를 깊은 도랑으로 갈라 놓았다.
방전이 놀라 뒤돌아보니 해평이었다. 지금은 말할 기운조차 없었기에 눈빛으로만 따져 물을 수밖에 없었다. '네놈이 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거냐!'
해평 이 화상은 참으로 망인*이 될 훌륭한 싹수였다. 그는 두 손으로 방전을 억척스럽게 부축한 채 팔짝팔짝 뛰며 응원했다. "존장, 화살 한 발 더 쏘세요. 아까 그거 효과 있었어요. 제가 보니까 하실 수 있어요!"
*망인(妄人): 미치광이처럼 두려움 없이 행동하는 사람.
"……"
썩 꺼지거라, 지 일 아니라고 입만 살아서 깝죽거리는 놈아!
"화살이 떨어졌어요?" 해평은 귀신같이 방 도통의 안색을 읽어내더니 어디서 주웠는지 거대한 나뭇가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건장한 성인 남자의 양팔을 벌린 것만큼이나 길었다. 자잘한 곁가지는 다 쳐내고, 위에는 너저분한 종이 뭉치들을 길게 꿰어 놓았는데, 모두 그가 안락향에서 뜯어온 음담패설들이었다. 아까 꽤나 부지런히도 움직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 신기한 도련님은 품에서 종이 부채 하나를 마저 꺼내어 큰 나뭇가지에 함께 꿰었다. "이걸 화살로 쓰세요! 그 조 존장 말로는 이 '인과수'가 남성 어르신의 신수라서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고 했어요. 일단 써 봐요! 빨리빨리, 지금 풍향이 딱 맞습니다!"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는 인과수는 눈뜨고 볼 수 없는 추잡한 물건들과 강제로 함께 엮인 채, 커다란 두 눈에 흉광을 뿜어내며 당장 저 해씨 성을 가진 개자식부터 찢어 죽이고 싶어 했다.
방전은 간신히 숨을 골랐다. "네 놈이 사람이냐!"
그는 해평의 어깨를 짚어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는 정말로 그 황당무계한 '화살'을 받아 들었다.
이번에 방전은 대마두의 몸통을 향해 나뭇가지를 쏘지 않았다. 잠시 가늠하더니 덜덜 떨리는 손을 필사적으로 잡아 누르며 그 장창 같은 거대한 나뭇가지를 하늘을 향해 쏘아 올렸다.
나뭇가지 따위의 평범한 물건이 어찌 승령 경지의 대능에게 닿겠는가. 활시위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산산조각이 났다. 그 위에 묶여 있던 종잇조각들도 가루가 되어 바람을 타고 함박눈처럼 태세를 향해 흩날렸다.
그 폐지 조각들에는 영기라곤 단 반 푼어치도 담겨 있지 않았기에 태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가 돌연 굳어버렸다.
태세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자신의 옷자락 끝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두 치* 크기의 인과수 한 마리가 무수한 종이 부스러기를 뚫고 날아와 그의 옷자락 위로 기어올랐다. 수의 위에도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명문 한가운데 내려앉은 인과수가 입을 크게 벌려 한 입 깨물었다!
작은 짐승의 형상은 곧바로 갈기갈기 찢겨 허공 속으로 사라졌지만, 옷자락 역시 한 귀퉁이가 뜯겨 나가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려 있던 명문의 선이 일순간 어긋나버렸다.
명문이란 도는 심오하기 짝이 없어 터럭만 한 차이가 천 리의 어긋남을 낳는 법이었다. 이렇듯 아주 작은 뒤틀림 하나에 금선으로 쌓아 올렸던 명문이 순식간에 붕괴되며 조정에게로 휩쓸려갔다!
무너져 내린 명문이 사방으로 날뛰자 태세의 옷자락은 마치 쇳물이 끓는 용광로가 된 것처럼 한밤중의 안락향을 대낮처럼 환하게 비추었다.
*약 6~7cm
그와 동시에, 해평과 방전의 귓가에 지 장군의 목소리가 울렸다. "너희 둘은 표범 쓸개를 먹고 자랐느냐, 어서 물러나지 못해!"
지 장군은 분명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어떻게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은 것일까? 해평이 미처 이유를 생각하기도 전에 방전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뒷덜미를 낚아채어 묘비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두 사람의 형체가 묘비 속에 간신히 숨어들기가 무섭게 맹렬한 분노가 담긴 용의 포효가 들려왔다. 사방으로 날뛰던 금선이 거대한 그물로 엉겨 붙어 한쪽은 태세의 몸을 칭칭 감고 다른 한쪽은 조정에 의해 땅속에 단단히 박혔다.
장대비가 한순간에 멎었다. 쏟아질 때만큼이나 갑작스러웠다. 마치 누군가 수문을 잠근 것 같았다.
주변이 돌연 정적에 휩싸였고, 온갖 소음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일순간 시공간마저 멎어버린 듯했다.
죽은 듯 고요해진 안락향 숲속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금빛 그물이 순식간에 조여들자 그물 한가운데 갇힌 거대한 용은 결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몸에 엉킨 그물을 떨쳐내려 안간힘을 썼다. 이윽고 극도로 맹렬한 번개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며 조정의 검신에 꽂혔고, 그 기세를 타고 용의 몸통을 꿰뚫었다.
거대한 용은 급소를 찔린 뱀처럼 고통스러워하며 용의 머리를 지면 위로 미친 듯이 솟구쳤다. 안락향 전체가 거의 초토화되었고 해평이 숨어 있던 묘비가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다. 하마터면 숨이 막혀 죽을 뻔했던 해평이 비석 안에서 굴러떨어졌고, 꼼짝없이 용의 꼬리에 부딪혀 날아갈 위기에 처했다!
바로 그때, 해평의 몸에서 돌연 붉은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머리 위로 덮쳐오던 용의 꼬리를 한차례 가로막았다.
굉음 속에서 그의 귓가에 여인의 가벼운 탄식이 스쳤다. 아주 짧은 찰나, 환청처럼.
그 틈을 타 방전이 다시 그를 끌어당기며 토둔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지면에서 무수히 많은 금빛 실이 '자라나' 조정의 검광을 뒤쫓았고, 흑룡과 태세의 인간 몸뚱이를 하나로 꿰어 여덟 토막으로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시신 조각들 사이에서 한 줄기 핏빛 광망이 솟아올라 하늘 끝을 향해 달아났으나, 꼬리에는 끝내 떨쳐내지 못한 금빛 실 한 가닥이 들러붙어 있었다. 다음 순간, 실을 따라 추격해 온 조정이 그 혈광을 지면에 박아버렸다.
짙은 피비린내가 '훅' 하고 사방으로 번져 돌무더기 속에서 막 기어 나온 해평을 기절시킬 뻔했다.
아득한 정신 속에서 이슬비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 멎었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빗물이 썩은 나무 냄새를 씻어냈지만 그 지독한 피비린내만큼은 도무지 씻어내지 못했다. 땅속에서 '우르릉' 하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천둥소리 같기도 하고 용의 울음소리 같기도 한 그것은 미세하게 진동하는 조정과 멀리서 호응했다.
천지가 뒤집힐 듯한 지진이 멈추었다. 용맥은 조정의 다독임 속에서 제자리로 돌아가 안정을 되찾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해평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는 자신이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안락향의 십여 묘가 넘는 넓은 숲 전체가 어디서 솟구친 것인지 모를 피에 흥건하게 젖어, 빗물과 함께 붉은 강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끔찍하게 유린당했던 원혼들이 이승으로 돌아와 생전에 미처 흘리지 못한 피를 한 맺힌 듯 모조리 쏟아내어 혈지옥을 가득 채운 것만 같았다.
해평은 머리가 무겁고 다리에 힘이 빠져 나무를 짚고 헛구역질을 했다. 평소 목에 잔뜩 힘을 주고 다니던 남의들이 하나같이 자신보다 비참한 꼴로 나뒹굴고 있었고, 몇몇은 아예 일어서지도 못했다. 멀리서 보니 애초에 팔다리가 성치 않던 사수들은 어디가 더 떨어져 나갔는지 온전한 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중에서도 두개골이 반쪽밖에 안 남아 있던 작자가 제일 끔찍했는데, 목 위로 남은 형체가 거의 없어서 과연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오직 장리만이 보이지 않았다.
해평은 이명이 가시지 않는 귀를 틀어막으며 살짝 마음을 졸였다. 속으로 생각했다. '도망쳤나?'
"네 어린 홍안지기를 찾느냐?" 상처투성이의 손 하나가 쑥 다가오더니 해평이 방금 전까지 줄곧 품에 안고 있던 술병을 낚아챘다. 엎어지고 구르고 흙바닥을 뒹구는 와중에도 술병은 기적처럼 떨어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해평이 무심결에 내뱉었다. "그녀는 제 홍안지기가 아니……"
"아니면 아닌 거지." 지수가 한숨을 쉬었다. "찾지 마라. 네 발밑에 있으니."
해평은 고개를 숙였다. 까만 가죽신은 이미 핏물에 흠뻑 젖어 방금 시체산과 피바다를 헤치고 나온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발밑에는 진흙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멍하니 고개를 들어 지 장군을 바라보았다.
지수는 대답 대신 소매로 술병에 묻은 핏물을 대충 닦아내더니, 더럽다는 내색도 없이 고개를 젖혀 병에 남은 술 두 모금을 삼켰다.
옆에서 누군가 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몸에 '환명부换命符'가 걸려 있었던 걸 몰랐나 보군."
방전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가와 지수에게 예를 올렸다. "사숙."
"예는 됐다." 지수가 온화하게 말했다. "사람을 불러 뒷수습해라."
그토록 오만방자했던 방전조차 지 장군 앞에서는 절로 한결 얌전해졌다. 그는 길들여지지 않은 거친 본성을 갈무리한 채 깍듯하게 "예" 하고 대답한 뒤, 고개를 돌려 호각을 꺼내 북쪽을 향해 세 번 불었다. 그러고는 다시 지 장군에게 목례를 하고 동료들과 사수들의 상태를 확인하러 갔다.
해평은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존장, '환명부'라니 그게 뭡니까?"
방금 전 함께 사선을 넘나든 덕분인지, 방전의 태도는 한결 누그러져 있었고 꽤나 인내심 있게 대답해 주었다. "'환명부'는 일종의 특수한 부적이다. 수위가 그리 높지 않아도 그릴 수 있지만 오랜 세월 지니고 다닌 자신의 소지품에 그려 넣어야만 하지. 환명부를 지닌 자가 치명적인 위험에 처하면 부적의 주인이 널 대신해 죽게 된다. 그래서 '환명*'이라 부르는 거다. 그녀가 네게 뭔가 준 적이 있느냐?"
*목숨을 바꾼다
해평은 무언가 떠올라 품에서 그 생진옥을 꺼냈다.
본래 혈옥에 가깝던 빛깔이 언제 변한 것인지 얼룩덜룩한 산호색으로 바래어 더욱 값어치 없어 보였다. 희미해진 '영안진씨' 네 글자 한가운데에 한 줄기 균열이 그어져 있었다.
장리의 억양은 줄곧 변한 적이 없었고 해평은 그녀가 영안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대마두는 그녀를 '진씨 자매'라 불렀다…….
이것이 그녀의 생진옥이었을까?
"확실히 부적의 흔적이 남아 있군." 방전이 그의 손에서 생진옥을 채어가더니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이런 부적은 호신부의 일종이라 해로울 게 없다. 총서의 인과수도 이걸 사물邪物로 취급하지 않았어. 아까 사수의 꼬리가 널 곶감으로 만들어버릴 뻔했을 때 돌연 움직임이 멈췄던 건, 아마도 환명부가 발동한 덕분일 게다. 네가 맞을 일격을 그녀가 대신 맞은 거지."
해평은 본능적으로 부인했다. "아니…… 걔는 제가 이 물건을 천기각에 바칠 거라고 생각했던 거 아니에요?"
"부적의 주인이 부주를 내릴 때 상대에게 자신의 피 한 방울만 마시게 하면, 훗날 환명부가 깃든 물건을 잃어버린다 해도 부주의 효력은 네 몸에 새겨져 사라지지 않는다."
해평은 멍해졌다.
맞다. 장리가 그에게 주머니를 건넬 때 확실히 이상한 맛이 나는 차를 한 잔 따라 주었었다. 그는 주전자에 녹이 슨 줄로만 알았다.
"쯧." 방전이 옥패를 도로 던져 주었다. "기생오라비처럼 반반하게 생긴 게 이득을 보는구나."
해평이 손을 뻗어 받으며 물었다. "존장, 저를 더는 의심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방전이 묘한 눈빛으로 그를 한 번 바라보았다. 조롱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렇다 할 악의가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해평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정작 그 화살이 겨누는 대상은 해평이 아니었다.
"너? 너희 같은 권문세가의 자제들이 세력 다툼에 혈안이 되어 분수를 넘고 무고나 사술 같은 걸 농간했다면, 네놈은 꽤 의심스러웠겠지. 하지만 사신을 참배하고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는 그런 멍청한 짓거리는…… 보통 너희와는 무관한 일이다." 방 도통이 약간 조소를 머금고 웃었다. "너희가 어디 그럴 재목인가."
해평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이 인생의 전부였고, 살면서 겪은 제일 큰 풍파라곤 후야께서 가법으로 그를 다스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지금, 그는 핏물 든 옷을 걸친 채 차가운 빗속에 서서 균열이 생긴 옥을 쥐고 장리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귀로는 그 사실을 들었으나 마음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피바다 속에 서서 그는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장리를 찾아내 따져 묻고 싶었다.
그녀는 그를 왕큰개 같은 족속과 한통속으로 보지 않았나?
그녀는 그가 옥에 적힌 사주를 발견하자마자 앞뒤 안 가리고 무조건 바칠 것이라 확신하지 않았나?
그녀는 그가 박정하고 바람기 다분한 데다 개자식에 망할 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왜 자신의 유일한 생진옥을 그에게 주었을까? 왜 그가 위험에 처했을 때 자신의 목숨을 그와 바꾸었을까?
그녀의 일생에 그렇게도 사람 구실 하는 남자를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단 말인가?
해평은 백 번을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어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깨달았다. 이제 장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선존께서 말씀하시길 그녀는 한 웅덩이의 핏물이 되어 안락향의 수많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여인들과 하나로 녹아들었다고 했다.
그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저 그녀가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한마디, '날 대하는 네 정은 분명 이슬보다도 얄팍했잖아'라는 말만 기억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목숨, 그녀의 운명, 그녀가 바쁘게 지나쳐온 일생의 궤적 중에 그 어느 것 하나 이슬보다 두터운 것이 있었던가?
하필 고작 연정 타령이라니…… 이 바보 같은 여자야, 무슨 헛소리를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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