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아흐렛날, 사경이 채 되기도 전에 해평은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깼다.
   무슨 꿈을 꾸었는지 눈을 뜨자마자 잊어버렸다. 침상 휘장에 매달린 생진옥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던 그는 옥에 새겨진 '사월 초구四月初九'라는 글자를 보고 떠올렸다. '장리의 생일이구나.'


   그는 몸을 뒤척이며 졸음이 가득한 채 눈을 감았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헤아렸다. '무엇을 주면 좋을까?'
   최근에 새로 얻은 남주 목걸이가 빛깔이 꽤 괜찮긴 한데, 알맹이가 너무 커서 마른 사람이 차면 투박해 보일 것이다. 금실에 법랑을 입힌 회중시계는 장식된 공작새가 다소 요란하긴 해도, 젊은 여인들은 화려한 것을 꺼리지 않으니 괜찮을지도 모른다. 또 마고헌수* 장식품도 하나 있는데, 옥의 질이 최상급은 아니어도 조각된 신녀의 모습이 얼핏 장리의 분위기를 제법 닮은 데다, '헌수'라는 의미도 생일에 어울리고 길하기도 하니, 차라리……
   *마고헌수(麻姑獻壽): 전설 속 선녀 마고가 장수를 축하하며 술을 바치는 도상(圖像). 중국에서 생일 선물의 대표적 소재.
 

   돌연 해평이 다시 눈을 떴다.
   생각났다. 이제 선물을 전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보니 이 일은 며칠 동안 그의 가슴속에서 소리 없이 발효되고 있었고, 이제야 비로소 견딜 수 없는 크기로 부풀어 올라 그의 그 지나치게 넓은 마음을 틀어막은 것이다.
   이것은 해평이 태어나 처음으로 겪어본 생이별이자 사별이었다. 감회가 깊다 할 수는 없었으나 그 여운은 길고도 질겼다.


   그는 옷을 걸치고 일어나 도망사*를 반 구절 써 내려갔다…… 그리고 나머지 반 구절은 끝내 지어내지 못했다. 다 쓰고 나서 제 글을 훑어보니 절로 서글픔이 밀려왔다. 자신의 대작이 그야말로 앞뒤가 맞지 않는 허튼소리라, 안락향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잡스러운 글귀'들과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도망사(悼亡詞): 아내나 연인의 죽음을 슬퍼하며 쓰는 시가(詩歌). 서진의 반악(潘岳)이 망처를 애도하며 쓴 「도망시」에서 유래했다.


   취류화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면서 일순간 금평의 유흥가는 빛을 잃었다. 해평은 문득 그 온갖 유흥의 세계가 모두 부질없게 느껴졌다. 며칠 전 어울려 다니던 무리가 말이 끌지 않아도 굴러가는 '연료 자동차油汽车'를 얻었다며 타러 가자고 불렀을 때도, 그는 영 흥이 나지 않아 거절했다.
   낮에는 할머니를 모시고 연극을 보거나 어머니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자세를 잡아주며 시간을 보냈고, 밤에는 할머니의 처소에 머물렀다. 노부인이 잠들고 나면 혼자 책을 읽었다.
   비록 두 장을 넘기기도 전에 곯아떨어지기 일쑤였지만, 어쨌든 진심으로 읽기는 읽었다.


   그는 또한 후야의 말씀대로 조만간 '도련님 부대'에 가서 자리를 하나 메우고, 그런 다음 장가 들어 자식을 낳아 번듯한 삶을 살 작정이었다.


   누가 알았으랴. 선인이 호탕하게 한 번 웃음을 터뜨리자, 범인의 명부가 통째로 지워지고 새로 쓰일 줄은.


   현은산의 징선첩이 후부에 도착한 것은 마침 후야의 휴무일이었다.
   진시 초각, 연세가 지긋한 노부인을 제외하고 온 집안 식구들이 늦잠을 자고 있었다. 선학 한 마리가 예의 바르게 후부로 날아들더니, 서재 지붕 위에서 꼬박 일 각을 기다렸다. 아침 햇살은 맞이했으나 살아 움직이는 인간은 끝내 보지 못했다.
   사명을 띠고 온지라 학도 어쩔 도리가 없어 결국 후원에 무단으로 침입했다.


   마침 꽃에 물을 주던 노부인은 이토록 상서로운 영물을 보고 깜짝 놀라, 자신의 수명이 다하여 선학이 본인을 서천으로 모시러 온 줄 알고 기겁하며 물뿌리개를 떨어뜨렸다.


   해평은 할머니 곁의 시녀가 소란을 피우는 소리를 듣고 집에 도둑이 든 줄 알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검을 쥐고 사람을 베러 뛰쳐나갔다. 살기등등하게 주변을 한 바퀴를 둘러보았으나 도적의 그림자조차 찾지 못했고, 어리둥절한 채 커다란 새에게 목패 하나를 떠안게 되었다. ……그리고 편지 한 통도 함께.
   목패는 무슨 재질인지 알 수 없었으나, 하품을 하던 해평의 코로 맑고 차가운 나무 향이 훅 밀려 들어왔다. 그 향기는 차가운 아침 안개 속에서 수천만 년을 외로이 서 있던 소나무의 물결과 대나무 숲을 떠올리게 했다. 그 향기가 폐부로 한가득 쏟아져 들어오자 단번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목패 앞면에는 한 그루의 대나무와 함께 '징' 자가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행서로 작은 글씨가 한 줄 적혀 있었다. 「영녕후 세자 해평, 사월 십오일, 잠수사潜修寺에 입문.」


   일 각 뒤, 단잠에 빠져 있던 영녕후부가 발칵 뒤집혔다. 하늘에서 붉은 비가 내리게 생겼는데 잠이 다 무어란 말인가!*
   이 장난처럼 돌아가는 후부가 배출해 낸 집안의 탕아가 놀랍게도 현은산 대선의 징선첩을 받다니!
   *'天都下起红雨了,还睡什么睡'. '하늘에서 붉은 비가 내린다'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의미의 과장 표현.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녀석은 아직 사람 구실조차 제대로 못 하는데 감히 신선이 될 자격을 얻었다!


   후야조차 얼이 빠져서 편지 봉투에 찍힌 현은산과 천기각의 금빛 인장을 여러 번 거듭 확인하고 나서야 감히 봉투를 뜯어보았다.


   편지의 내용은 간결하고 명확했다. 예비 제자 해평은 언제 어디서 천기각 제단에 참배하여 성인을 뵌 후 잠수사로 향할 것이며, 수행 기간은 일 년이라는 것뿐이었다.
   그 뒤로는 석 자 길이에 달하는 길고 긴 문규*가 덧붙여져 있었다.
   어떻게 가는지, 무슨 물건을 챙기고 어떤 복장을 입어야 하는지 등 자질구레한 사항은 일절 언급되지 않았다. 현은산의 대선은 애초에 명문세가 자제들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니, 그 안의 관례를 모르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규(门规): 문파의 규칙
 

   충격이 휩쓸고 지나간 뒤 온 가족이 서로의 얼굴만 멀뚱히 마주 보았다.
   징선첩 한 장이면 금평성의 내로라하는 명문거족들이 피 터지게 싸울 물건이거늘, 이 별난 집안은 뜻밖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횡재를 맞고도 정신을 차려보니 놀랍게도 얼굴에 기뻐하는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후야는 편지를 여러 번 거듭 읽고 몹시 무거운 얼굴로 목소리를 낮춰 집안사람들에게 장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라고 분부했다.
   노부인은 명주 손수건으로 손을 받친 채 비단함 하나를 찾아와 그 목패를 고이 모셔두고는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현은선문에서…… 우리 귀한 보배에게 징선첩을 보냈다고?"
   영녕후 부인 최씨가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 집안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는데……. 전 벌써 며느릿감까지 보러 사람을 보냈단 말이에요. 이게 무슨 일이죠?"


   노부인이 단언했다. "선문에서 올해 정원을 늘린 게 틀림없을 게다."
   최 부인은 갈수록 시름이 깊어졌다. "멀쩡하던 선문이 왜 갑자기 정원을 늘린걸까요? 행여 세상이 안팎으로 시끄러워지려는 거 아닐까요?"


   최 부인은 서화에 능하고 재치가 넘쳐, 온 집안을 통틀어 유일하게 풍화설월을 제대로 읊조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머지 식구들은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그녀가 읊는 '풍화설월' 그 자체가 되어 배경 노릇이나 충실히 해줄 뿐이었다. 그 옛날 그녀가 후야를 꾀어 잡은 무기도 바로 이 재주였다. 다만 유독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은 흔히 봄날에 지는 꽃을 슬퍼하고 가을의 쓸쓸함에 눈물짓기 마련이라, 무슨 일이든 자꾸만 나쁜 쪽으로 부풀려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며느리의 이 병통을 잘 아는 노부인은 서둘러 그녀를 달랬다. "어찌 되었든 좋은 일이지 않느냐."
   그러고는 자애로운 손길로 해평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할아비는 영 못난 위인이라, 수재 시험을 팔 년을 치고 거인 시험에 평생을 매달리다 결국 집안 돈을 털어 보잘것없는 벼슬 하나를 샀더랬지. 만약 우리 귀염둥이가 이토록 출세한 걸 알면 아마 잇몸이 다 드러나게 웃으며 조상 묘에서 기어 나오실 게다!"


   “……”
   굳이 그 어르신을 깨우실 것 까지야.


   노부인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다만 산중에는 해와 달이 없으니*, 만에 하나 잠수사에서 내문으로 뽑히기라도 한다면 네가 환골탈태하여 산을 내려올 즈음엔 이 할미가 이미 다음 생으로 떠나고 없을 텐데. 그럼 우리 예쁜 귀염둥이를 다시는 못 보겠구나."
   최 부인은 그 말을 듣고 묵은 근심이 채 가시기도 전에 새로운 시름이 더해져 눈시울이 붉어졌다.
   *'山中无日月'. 산속에는 세월이 없다는 뜻. 선산에서의 시간이 인간 세상과 다르게 흐른다는 도교적 관념.


   후야는 속으로 '두 분 다 참으로 생각이 많으시오.' 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문이라니…… 내문이 무슨 고물상인 줄 아나?
   그때 해평이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그럴 일 없어요. 전 길어봐야 잠수사에서 일 년 머물다 돌아올 거예요. 어머니께선 며느릿감 계속 알아보세요. 제가 돌아와서 장가들면 되니 아무 지장 없어요."


   영녕후는 이런 허튼소리를 듣고 당장이라도 수염을 파르르 떨며 화를 내려 했다. 그러나 미처 숨을 뱉기도 전에 어머니와 부인이 이구동성으로 "하늘이 보우하사, 그렇게만 되면 참 잘된 일이구나!" 하고 외치는 바람에 꿀꺽 삼키고 말았다.
   이 집안에선 자신이 끼어들 틈이 없었기에 후야는 어쩔 수 없이 분통을 터뜨리며 해평을 매섭게 노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해평은 그저 심드렁했다. 솔직히 그다지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뱉자니 주는 체면도 못 받아먹는 무례한 놈처럼 보일까 봐 꺼려졌다. 그는 금세 마음을 고쳐먹었다. 산골짜기에 갇혀 지낸다니 듣기만 해도 괴롭긴 했지만, 다행히 고작 일 년뿐이었다. 운 좋게 요령껏 잘 버티다 돌아오면 천기각에 줄을 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대단한 천기각 아닌가! 
   아무리 철없는 소년이라 해도 소년은 소년인지라 강자를 동경하기 마련이었다.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던 밤 방전이 활시위를 당기던 그 듬직한 뒷모습은 기어이 그의 가슴에 깊은 동경의 낙인을 찍어놓고 말았다. 잠수사에 들어간 뒤의 상황이야 그때 가서 볼 일이고, 어쨌든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분발하여 뼈 빠지게 수련해 보겠노라 굳게 다짐했다.


   그의 뜻밖의 입선은 한가롭던 집안의 일상을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노부인과 최씨는 잠수사에 들어가면 일 년 동안 산 밖으로 나올 수도, 가족과 연락할 수도, 수발을 들어줄 하인도 없으며, 심지어 가져갈 수 있는 짐조차 한정되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나란히 사색이 되었다. 그녀들의 금지옥엽이 마치 먼 변방으로 유배라도 가는 기분이었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귀에 못이 박일 듯한 당부와 잔소리가 쏟아졌다. 해평은 꾹 참고 전부 고분고분 받아들였다.
   이것은 후야가 어릴 적부터 몸소 가르치고 보여준 처세술의 결과였다. 짐승조차 제 보금자리로 돌아가면 발톱을 숨길 줄 아는 법. 화를 낼 거면 밖에 나가서 내고, 일단 집안에 발을 들인 이상 절대 노모와 아내에게 험악한 낯빛을 보여선 안 된다. 해평은 어려서부터 이 두 마님에게 주물려지는 데 습관이 들어 있었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그조차도 버티기가 벅찼다. 최 부인은 필시 선산에 들어가면 벽곡*을 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 모양인지, 일 년 치 식량을 미리 다 먹여 치울 기세였다. 하루 세끼 보양식에 여섯 번의 간식까지 더해지니, 해평의 등짝에 자칫하면 낙타 혹이 자라날 판이었다.
   해평은 급기야 체기가 올라와 며칠 내내 목구멍으로 비릿한 냄새가 치밀어 올랐고, 밤에는 온갖 잡다한 악몽이 실타래처럼 엉켜들었다. 누군가 자꾸만 귓가에서 나지막이 그 환혼조를 흥얼거리는 것만 같았다.
   *벽곡(辟穀): 곡식을 끊고 기(氣)만으로 살아가는 도교의 수행법.


   해평이 집안에서 더는 버티지 못하고 인내심이 바닥날 즈음, 마침내 출발일이 성큼 다가왔다. 떠나기 전, 그는 장왕부에 들러 삼형에게 작별을 고했다.
   장왕은 그가 온갖 잔소리에 시달리다 못해 지쳤다는 걸 이미 아는 듯했다. 혹은 날이 갈수록 더워져 기력이 쇠한 탓인지 드물게 과묵했다. 그저 이번 입선자 중 대략 누가 있는지만 간략히 일러주고는 떠날 때 이중으로 된 커다란 비단함 하나를 건네 주었다.


   장왕은 평소에도 질 좋은 차나 술을 구하면 그에게 후부로 가져가라 하곤 했다. 해평은 늘 받던 대로 암 생각 없이 함을 들고 나왔는데 집에 돌아와 열어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비단함 안에 든 것은 다름 아닌 찻잎이나 다과 따위가 아니라, 놀랍게도 '강격선기'였다!


   '선기仙器'란 오직 선인만이 다룰 수 있는 기물이다.
   선기에도 품계가 있어, 고수는 저등급의 선기도 쓸 수 있지만 그 반대는 불가능했다. 이를테면 개규기의 반선이 현은산의 진산신기를 손에 쥔다 한들, 갓난아기에게 거대한 대마도를 쥐여준 것과 같아 작동시킬 수 없었다.
   영규가 트이지 않은 범인이 선기를 부릴 수 없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으나, 도월금이 속세에 내려온 이래 최근 수십 년간 인간 세계의 증기 기계 기술이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고, 이는 역으로 현문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부 연기대사들이 하급 선기에 기계 부품을 달아, 영석을 동력원으로 삼고 등유를 보조 연료로 때워 움직이게끔 개조해 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범인도 쓸 수 있는 '강격선기'였다.


   물론 '강격선기'를 두고 현문 내에서는 여전히 논란이 많았다. 소문에 따르면 보수적이고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곤륜에서는 아예 이런 물건을 금지한다고 했다.
   반면 현은산은 훨씬 관대한 편이었다. 애초에 '방금술'과 '선기강격'을 처음 주창한 임치가 바로 현은 문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강격선기는 여전히 무척이나 희귀했다. 첫째, 선기의 등급을 낮추고 나면 원판에 비해 기능이 단순해지고 사용에 제약도 많아지는 데 반해, 그 안에 들어가는 기계 부품은 세공이 복잡하여 극히 높은 비용이 들었다. 강격선기로 개조하는 공수가 고위급의 온전한 선기를 새로 주조하는 것 못지않게 까다로웠던 것이다. 연기사들은 하나같이 자부심이 높아 웬만해서는 범인들을 위해 굳이 이런 수고를 들이려 하지 않았다.
   둘째, 강격 선기는 등유 외에도 영석을 태웠다.


   영석 중에서도 가장 질이 낮고 불순물이 많은 '청광青矿'석조차 한 냥 무게면 황금 한 냥을 주어야 했다.
   하품에 속하는 '벽장碧章'의 시가는 황금 열 냥이며, 손가락 마디만 한 벽장 구슬 하나면 훌륭한 명마 한 필과 맞바꿀 수 있었다.
   중품인 '남옥藍玉'은 시작가가 황금 사십 냥에 달했다. 영녕후의 일 년 치 봉록이 많지도 적지도 않게 딱 남옥 한 냥어치였다.
   상품인 '백령白灵'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빛깔이 그럭저럭 괜찮은 백령 구슬 하나는 황금 백 냥을 호가했다. 땅값이 금값인 제국의 수도에서 번듯한 저택 한 채를 너끈히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강격선기에 사용하는 영석은 불순물이 너무 많으면 안 되었기에 최소한 벽장석 이상은 되어야 했고, 유난히 까다로운 기물은 아예 남옥을 태워야만 돌아갔다. 그렇지 않으면 기물의 수명에 악영향을 미쳤으니, 어느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장왕이 준 이단 비단함 윗칸에는 도월금이 테두리에 박힌 백옥판 한 쌍과 액운을 막아주는 자그마한 호신용 장신구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아래칸에는 '남옥' 영석 구슬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나무 상자를 열자마자 뿜어져 나오는 짙은 영기에 서재의 공기가 일순간 맑아졌다. 어지간히 출력이 큰 강격선기라도 이 정도 양이면 몇 년은 너끈히 쓸 수 있을 터였다.


   해평은 눈부신 푸른빛에 순간 눈이 멀 뻔하여 엉겁결에 소리쳤다. "세상에. 삼형은 아직 딸도 없으면서 벌써 미래의 혼수부터 저한테 떠안겨 준 걸까요?"
   후야가 그를 쏘아보았다.


   "전 또 먹을 건 줄 알았죠." 해평이 궁시렁거렸다. "이런 물건인 줄 알았으면 안 받았을 텐데."
   후야가 말했다. "이건 전하께서 널 아끼시는 성의다. 주셨으면 가져가거라. 어차피 네게 다 쓸모가 있는 물건들이다. 우리 가문이 전하의 살림을 궁색하게 만들 일은 없을 터이니."


   그러면서 후야는 상자 안에서 백옥판 한 개를 꺼내 들었다. "이 두 개의 옥판 중 하나는 네가 가져가고, 나머지 하나는 할머니께 갖다 드려라."


   "이건 뭐예요?" 해평이 옥판을 집어 들고 요리조리 살폈다. 티 없이 맑은 백옥의 우측 상단에 도월금으로 조각된 자그마한 비단잉어 한 마리가 생동감 넘치게 매달려 있었다. "도마인가 ……앗, 아니, 아버지, 우리 부자지간에 말로 점잖게 타이르시면 안 됩니까! 자꾸 손발이 먼저 나오시니 제가 잽싸게 피하다 아버지 허리라도 다치시면 또 제 불효가 되잖아요."


   "이건 '지척咫尺'이라 부른다." 후야는 날렸던 무영각*을 거두어들이며, 턱짓으로 해평에게 옥판을 내려놓으라고 시늉했다.
   *무영각(无影脚): 그림자도 안 보일 만큼 빠른 발차기, 황비홍(黃飛鴻)의 필살기로 유명한 무술 용어
 

   그가 두 옥판 바닥의 홈에 남옥 구슬을 각각 하나씩 끼워 넣자 옥판 위로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후야는 붓을 가져와 해평에게 사용법을 보여주었다. 그가 한쪽 옥판 위에 '해' 자를 쓰자, 다른 쪽 옥판 위에 물결 같은 형광빛이 일더니 이내 같은 위치에 똑같은 모양의 '해' 자가 떠올랐다.


   "이 '지척' 두 개에 영석만 꽂아두면, 천 리 만 리가 떨어져 있어도 서로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다. 잠수사에서는 제자들이 가족과 서신을 나누는 것을 금하지만 전신선기를 막는 금제는 걸어두지 않으니 가져가는 것을 묵인하는 셈이지." 후야가 설명했다. "나와 네 어미야 그렇다 치더라도, 할머니께서는 연세가 있으시니 입 밖으로 내지는 않으셔도 자손이 먼 길 떠나는 것을 몹시 애달파하신다. 설령 할 말이 없더라도 매일 잊지 말고 꼭 어르신께 안부 인사를 올리거라."


   해평이 답했다. "아, 네."


   후야가 옥판에 장식된 도월금 비단잉어를 누르자, 죽어 있던 물고기가 돌연 살아 움직이듯 꼬리를 파닥거렸다. 물고기가 후야의 손가락을 따라 옥판 위를 헤엄쳐 다녔다. 녀석이 지나간 자리의 글씨가 수증기처럼 흩어져 지워졌다. "거기 앉아라. 똑바로 앉고. 몇 마디 더 당부할 것이 있다."
   해평은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아버지의 훈화를 기다렸다.


   후야가 말했다. "네가 징선첩을 받게 될 줄은 짐작도 못 하였기에 이런 가르침을 미리 일러주지 못했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범인이라 선문 안에 우리를 비호해 줄 연줄이 없다. 네가 금평에서 하던 버릇대로 함부로 말썽을 피웠다간 그곳에선 아무도 네 뒤를 수습해 줄 수 없다는 뜻이다."
   해평이 항의했다. "아버지도 참, 제가 무슨 사고뭉치라도 됩니까?"
   후야가 반문했다. "그럼 네가 무어란 말이냐?"


   해평이 반박하려던 찰나, 아버지가 다시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해씨 성을 가진 자는 선문의 문턱조차 밟을 수 없는 법. 네가 이번에 길을 나설 수 있었던 건 오직 귀비 마마와 장왕 전하의 이름을 달고 가는 것이니 설령 네 스스로 죽을 짓을 저지른다 해도, 절대 남에게까지 그 화를 미치게 해선 안 된다!"


   "……네."


   그런데 후야는 무엇이 떠올랐는지, 거기까지 말하고는 넋이 나간 듯 시선이 서재 창밖으로 흘러갔다.
   어느덧 밖은 짙은 땅거미가 깔려 있었다. 창밖으로 일렁이는 나무 그림자가 한때 금평성 제일의 미남으로 꼽히던 그의 옆얼굴 위로 드리워지며, 잿빛으로 세어버린 양옆 머리를 다시금 검게 물들였고 눈가에 깊게 파인 주름을 더욱 짙어 보이게 했다.
   세월이 인간을 조각하는 솜씨는 예나 지금이나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해평은 돌연 후야가 자신이 징선첩을 받은 사실을 그리 반기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할머니나 어머니가 품는 단순한 걱정과는 달랐다. 무언가…… 훨씬 더 깊고 아득한 근심이었다.
   그는 다시 그 백옥지척 한 쌍을 내려다보았다. 마음속 의혹이 짙어졌다. 어릴 적부터 후야는 그에게 '선과 속은 다른 세계이니 선가仙家의 일은 공경하되 멀리해야 한다'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그들 집안은 여느 가문들과 달리 오로지 조상에게 제사만 지낼 뿐 절대로 향을 피워 신을 섬기지 않았고, 집안 그 어디서도 흔한 종이 부적이나 명문 따위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정작 후야 본인은 이런 강격선기에 꽤 익숙해 보이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


   그때, 상념에서 빠져나온 후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잠수사에서 가르침을 전하는 선존이든 함께 수련하는 동문이든 함부로 원한을 사지 말거라. 우리는 입신양명을 바라지도 않으니, 네가 굳이 그 '구름 위' 사람들에게 아부할 필요도 없다. 알겠느냐? 그리고……"
   영녕후는 하마터면 목구멍까지 차오른 '절대 내문에 들어가지 말라'라는 당부를 삼켜버렸다. 고개를 들어 그 철없는 자식을 보니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매회 대선마다 예비 제자 중 단 한 명이라도 내문에 들면 대단한 판국에, 그 잘난 금지옥엽들이 줄을 섰는데 내문이 저 골칫덩어리와 반 푼어치 인연이라도 닿을 리가 있겠는가? 이런 말을 꺼냈다간 제 분수도 모르는 멍청이로 보일 게 뻔했다. 두꺼비에게 '선녀 항아에게 장가가지 마라' 하고 신신당부하는 꼴과 다를 바 없었다.


   "……그냥 잠수사에서 네 그 가벼운 성미나 좀 고쳐오면 다행이겠구나. 무탈하게 다녀오너라. 일 년 뒤에 무사히 돌아와서, 네 어미와 할머니께 걱정 끼치지 말거라."
   해평이 말했다. "아버지, 저를 보내기 아쉬우시면 그냥 섭섭하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시지, 왜 자꾸 남의 깃발을 빌려 세우세요? 연세를 드실수록 체면치레가 더하시네요."
   "……"
   망할 녀석!
   늙은 아버지는 차마 체면을 구기고 인정할 수 없어, 소매를 걷어붙이고 이 불효자를 쫓아냈다.


   이튿날 이른 아침, 해평은 마지막으로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집안 하인들이 온몸을 치장해 주는 것을 받았다. 그리고 할머니와 부모님께 큰절을 올린 뒤 천기각으로 향했다.
   천기각 주변의 사거리가 빈틈없이 통제되었다. 태명 황제가 친히 행차하여 구면*을 갖춰 입고 삼공구경**을 거느린 채 진시부터 천기각 제단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구면(裘冕): 황제의 예복 
   **삼공구경(三公九卿): 조정 최고위 관직의 통칭


   예비 제자들은 오와 열을 맞춰 꿇어앉아 성훈聖訓을 경청했다.


   올해의 훈화는 이례적으로 짧았다. 폐하께서는 그저 '몸과 마음을 갈고닦아 나라와 집안을 비호해라'라는 등 의례적인 말씀 두세 마디만 남기고 입을 닫으셨다. 말이 길다던 소문과는 영 딴판이었다.
   듣자 하니, 원래 매번 대선을 주관하러 오는 선사들은 항상 늦게 나타나는 데다, 수위가 높을수록 격식을 더 차려 늦게 오는 탓에 모두 멀건히 기다리기가 민망했다. 그 지루하고 민망한 공백을 채우는 건 오로지 폐하의 훈화 시간뿐이었다. 그래서 폐하께서는 매번 장광설을 준비해야 했고, 차라리 입에 말을 더듬는 병이라도 생겨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보고 싶어 하셨다고 한다.
   게다가 올해는 무려 승령봉주께서 친히 왕림하신다 하니, 다들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까지 기다리는 건 아닌가 체념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 장군께서 진시 초각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타나신 것이다.


   지수가 강림할 때는 어검도, 선학의 호위도 없었다. 그는 눈에 띄지 않는 은색 명문이 새겨진 연회색 장삼으로 갈아입은 채, 사치스럽지도 옹색하지도 않은 아주 단정한 차림으로 나타났다. 만약 천기각에 주재하던 반선 전원이 일제히 기립하여 예우를 갖추지 않았더라면 멀리서 보았을 땐 그저 평범한 서생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지 장군은 백 년 넘게 선문에 은거했으면서도 여전히 대완 제국의 신하로서 지켜야 할 본분을 잊지 않은 듯했다. 그는 폐하와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고 함께 천지에 제사를 올리며 인간 세상 제왕의 체면을 충분히 세워주었다.


   오시 이각*, 서른한 대의 차가 천기각 문 앞에 줄지어 정차했다. 잡역부들은 진작에 제자들의 짐을 차에 다 실어놓은 상태였다. 차를 끄는 것은 하나같이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백마들이었는데, 그 짐승들의 눈동자가 기이하게도 벽장 영석 특유의 청록빛이 감도는 색을 띠고 있었다. ……아마도 살아있는 말이 아니라 모종의 선기인 모양이었다.
   *대략 오전 11시 30분


   천기각 총서와 도성 안 일곱 개의 청룡탑에서 세 번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태명 황제가 동문 밖까지 선사를 배웅했다. 지 장군은 조정검을 딛고 허공으로 솟아올라 선문으로 복명을 하러 떠났다.


   이어서 모든 제자들이 군부를 향해 하직 인사를 올렸다.


   해평은 무리 사이에 섞여 예를 행하면서 몰래 천자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가 아주 어렸을 적 궁에서 태명 황제 주곤周坤을 알현한 적이 있었으나, 이른바 '천안天颜'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기억은 이미 까마득하게 흐려진 뒤였다. 다만 해평의 아스라한 기억 속 폐하는 마치 남성산처럼 거대하고 웅장했으며, 유난히 크고 두툼한 손을 가졌고 어린아이들에게 무척 다정하게 말을 건네며 상도 자주 내리던 분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 순간에야 이르러서야 폐하께선 산처럼 거대하지 않으며, 심지어 자신보다도 체구가 작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태명 황제는 역광을 등지고 서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무겁고 화려한 예복을 걸친 모습이 장엄하다 못해 근심에 잠긴 듯했다. 그의 등 뒤로 반룡기둥에 새겨진 두 마리의 용이 성난 듯 수염과 갈기를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까닭 없이 해평의 머릿속에 태세의 그림자 속 분노한 용의 환영을 일깨웠다.


   의식이 모두 끝난 후, 제자들은 천기각의 호위를 받으며 잠수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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