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est 太岁(태세) 제1장 진강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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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岁》priest ^第1章^ 最新更新:2021-04-26 11:17:42 晋江文学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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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반가(夜半歌): 한밤중의 노래
남완 태명 28년, 늦봄.
제도 금평의 꽃은 모두 지려 하는데 안개는 아직 걷히지 않았다.
연기*의 대종사 '점금수**' 임치 선존이 '방금술'을 속세에 내린 뒤로 인간 세상의 안개는 해가 갈수록 농후해졌고 해가 갈수록 매캐해졌다.
*연기(炼器): 본래 선협 세계관에서 도술과 영력을 이용해 신비한 무기나 도구(법보)를 제련하고 만드는 기술을 뜻함.
**점금수(点金手): 무엇이든 닿기만 하면 황금으로 만드는 손. 최고의 법기나 선기를 연성해내는 전설적인 연기사(炼器师)나 훌륭한 솜씨를 의미함.
하지만 딱히 불평할 일은 아니었다.
방금술로 빚어낸 '도월금'은 하늘이 내린 신물이었다. 도월금으로 만든 증기 기관은 힘이 장사라 백 장 길이의 거대한 배를 띄워 북명의 바다를 가뿐히 건너는 건 예사였고, 그 동력으로 움직이는 첨각대차*는 산을 깎고 바다를 메울 수도 있었다. 남쪽 성벽 밖에는 크고 작은 공장들이 부지기수로 들어서, 기계들이 종일 굉음을 울리며 질 좋은 명주실과 면사를 물 흐르듯 쏟아냈다. 대운하를 따라 북쪽으로는 북력에 팔고 서쪽으로는 서초까지 운송했으며 남촉의 첩첩산중은 무더위가 계속되는 탓에 얇은 망사와 비단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도월금에 생계를 건 가구 수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성 서쪽 삼십 리 밖에 재작년에야 완공된 '미진주'는 벌써 인파와 화물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하얀 증기를 내뿜는 기차를 민간에서는 '등운교'라 불렀는데, 매일 철로 위를 분주히 내달리며 아침저녁으로 한 대씩 운행했다. 아침 기차는 화물을, 저녁 기차는 사람을 실어 날랐다.
*첨각대차(尖角大车): 직역하면 '뾰족한 뿔이 달린 큰 수레', 동력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차량
이것이 어찌 선인이 창생을 윤택하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금평성 위를 덮은 안개는 안개가 아니라 상운*이라 불러 마땅했다.
*상운(祥云): 신선이 타고 다니는 상서로운 구름.
설이 지나자 수많은 젊은 장정들이 도성으로 밀물처럼 몰려들어, 미진주는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성 안에서 집을 구하기란 턱없이 비싸, 능양하 동쪽 기슭의 개집 같은 방조차도 장정 한 명의 한 달 치 식대인 돈 반 냥이 없으면 세를 얻을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외지에서 온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이 남쪽 성곽 밖 공장 지대의 판잣집으로 몰려들었고, 성 밖에는 거의 번듯한 마을 하나가 생겨날 지경이었다.
올해 금평성은 특히 번화했다. 십 년에 한 번 돌아오는 '대선년'이었기 때문이다.
선문에서 제자를 거두는 해였다.
대완에서 감히 '선문'이라 칭할 수 있는 곳은 국교인 '현은' 단 한 곳뿐으로, 당대 사대 선문 중 하나였다.
대선년마다 현은에서는 길일을 택해 금평으로 선사를 보내 속세의 영재들을 발탁하여 선도로 인도했다. 금평성은 설부터 시끌벅적했고 각지의 영웅호걸들도 덩달아 들썩였다. 선문 후보자들은 향을 피워 신께 기도하며 심신을 수양했고, 거인 나리들은 회시를 치르러 입경했으며*, 표국과 무관들은 비무 대회를 열었다. 심지어 화류계조차 질세라 표를 팔아 '화괴장원*'을 뽑으며 흥을 돋웠다.
사람이 많으니 일거리도 넘쳐났고 성 안에는 일손을 구하는 곳이 많았다. 힘깨나 쓰는 이들은 운수를 노리며 몰려와 늘 밥줄을 찾을 수 있었다. 비록 국교가 고관대작의 자제들 중에서만 제자를 뽑아 평민 백성들과는 무관한 일이었음에도, 사람들은 한마음으로 대선년을 손꼽아 기다렸다.
*거인(举人) & 회시(会试): '거인'은 향시(지방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뜻하며, 이들이 중앙 조정에 나아가 치르는 본 시험이 '회시'임.
*화괴(花魁): 기루에서 으뜸가는 기생
선사가 하산하면 그 해는 틀림없이 비바람이 순조롭고 오곡이 풍성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곡이 그리 풍성하지 않아도 좋았다. 상경하여 능양하의 화려한 놀잇배를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견문을 넓힌 셈이었고, 멀리서 현악 소리와 노랫가락이라도 몇 소절 듣는다면 고향에 돌아가 화괴의 노래를 들었다며 반평생 허풍을 떨기에 충분했으니까.
4월 초하루, 꽃이 질 무렵.
금평성 제일의 명소 취류화에서 열린 '감화회'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봄빛마저 무색하게 할 만큼 눈부신 자태에 연지 가루가 온 도시에 붉은 먼지처럼 흩날렸고, 별실 입장권인 '감화간'은 천금을 주고도 구하기 어려웠다.
이날 오후, 영녕후야도 시인 묵객을 자처하는 무리에게 끈질기게 이끌려 마지못해 취류화에 발을 들였고, 새로운 화괴가 탄생하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올해의 화괴는 명기 장리였다. 후야는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며 건성으로 힐끗 쳐다보고는 이 '명화名花'가 딱히 장점이라곤 없이 눈썹과 눈꼬리가 처져 박복한 인상이라 여겼다.
하지만 취류화 안에서 밤새 요괴들이 난장판을 벌이는 통에, 다들 얼굴에 백분을 세 겹씩이나 두껍게 칠해 놓아 누가 누군지 분간조차 어려웠다. 후야가 그 소란에 눈살을 찌푸리던 참에, 장리가 수수한 옷차림에 옅은 화장을 한 채 단 한 명의 악사만 대동하고 무대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 노래 실력을 떠나 시끄럽지 않은 것만으로도 일단 호감이 갔다.
그녀가 부른 곡은 새로 선보이는 곡이라 했는데, 악사를 어디서 구해왔는지 꽤 솜씨가 있어 혼자서 금을 타며 무대를 꽉 채웠고, 금과 노래 모두 수준급이었다. 객석의 빈객들도 귀가 번쩍 뜨였는지 한 곡조가 끝나자마자 금은보화와 장신구가 눈송이처럼 쏟아졌다. 쏟아지는 찬사에 승강 무대의 증기가 마구 치솟아 작은 누각은 순식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루로 변했다.
이리하여, 화괴장원의 상징인 동백 화관은 장리 아가씨의 머리 위에 씌워졌다.
장리가 화관을 쓰고 무대를 내려와 감사를 표하자, 돈을 쏟아부은 단골손님들이 술을 권하고 한 곡조 더 뽑아달라 청했고, 그녀는 일일이 응해야 했다. 다행히 객석엔 신분 있는 자들이 많아 선을 넘는 난동은 벌어지지 않았다. 한 바퀴를 돌고 나서 한숨을 돌린 그녀가 막 인사를 하고 물러가려는데 어디선가 한가한 작자가 끼어들었다.
"장원 낭자, 오늘 장원에 오른 공의 반은 저 악사에게 있소. 보아하니 기루에 새로 들어온 아이 같은데, 원래 있던 애들보다 솜씨가 한참 윗길이구려. 이리 불러내어 얼굴이나 틉시다. 앞으로 우리도 잘 챙겨 줄 테니 말이오!"
장리의 악사는 줄곧 얼굴을 가린 채 얇은 장막 뒤에 숨어 있다가 무대에서 내려올 때 긴 치맛자락만 살짝 내비쳐 묘한 호기심을 자극하던 참이었다.
장리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웃음을 지어 보이며, 원래 자신의 악사가 손을 다쳐 오늘은 외부에서 임시로 악사를 모셔 온 탓에 취류화에서 얼굴을 내밀기 곤란하니 나리들께서 너그러이 양해해 달라고 둘러댔다.
그러나 나리들은 물러서지 않고 웅성거렸다. "안팎이 무슨 상관이오? 좌중에 이렇게 귀인들이 많소! 춘위*의 진짜 장원 낭군이 와도 말에서 내려 읍을 올릴 판국에, 일개 기방의 장원 나부랭이가 어찌 이리 콧대를 세운단 말이오?"
*춘위(春闱): 봄에 치러지는 과거 시험인 회시(会试)를 이르는 다른 말.
장리는 본래 '청아하고 세속을 벗어난' 부류라, 지나치게 세속을 벗어난 나머지 처세술이 부족하여 이런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수완이 서툴렀다. 그녀가 어찌할 바를 몰라 굳어 있을 때, 누군가 입을 열었다. "나갑지요! 까짓것 보여 드리면 될 것 아닙니까——보실 배짱만 있으시다면야."
묵직한 본래의 음색을 억지로 쥐어짜 올린 터라, 제대로 올라가지도 못한 채 기괴하게 찢어진 그 목소리는 듣는 이의 소름을 쫙 돋게 했다.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보니, 장리가 그토록 꽁꽁 숨기려 했던 악사는 오히려 호탕하게 제 몸집만 한 거문고를 어깨에 척 메고…… 아니 안고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오고 있었다.
이 자는 유행하는 미인도풍으로 화장을 짙게 떡칠한 데다, 새하얗게 분칠한 얼굴 위로 속살이 비치는 망사까지 덮어쓰고 있었다.
보통 이 정도로 화장을 엉망으로 해도 이목구비의 윤곽은 보이기에 본판이 그리 추녀는 아닐 터인데…… 왠지 모르게 그녀의 온몸에서는 기괴한 기운이 풀풀 풍겼다.
이 자는 지나치게 덩치가 크고 우람했다. 다른 아가씨들은 기껏해야 그녀의 어깨에 닿을락 말락 했고, 그 커다란 하얀 머리통이 군계일학처럼 뭇 꽃들의 정수리 위로 우뚝 솟아 있어 섬뜩하기까지 했다. 키도 크고 골격도 억세서 그녀의 '가녀린 어깨'에 떡하니 자리 잡은 호방한 쇄골은 당장이라도 소매를 터뜨릴 기세였고, 무지막지한 발 크기는 수놓은 꽃신을 돛단배 두 척처럼 팽창시켰다. 몸을 꼬며 걷자 천지가 진동하는 듯했다…... 심지어 걷는 모습도 같은 쪽 팔다리가 함께 움직이는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였다.
이 분은 무대로 나와 둥글게 인사를 올리더니, 씨익 웃으며 사방팔방에 새하얀 치아를 한가득 전시했다. 급하게 바른 연지가 이에 번진 탓에 쩍 벌린 시뻘건 입은 마치 방금 죽은 아이를 뜯어먹고 입가심도 안 한 요괴 같았다. 한 번 더 봤다간 귀신이라도 들릴 듯한 몰골이라, 좌중의 귀빈들은 기겁하며 술이 확 깰 지경이었다!
이 무렵 영녕후는 이미 조용히 자리를 뜨던 참이었다.
후야는 소싯적 미색이 뛰어나 금평 제일의 미남자로 이름을 날리며 수레에 과일이 가득 찰 정도*로 인기를 끌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보기에 이 '명기'들의 외모도 고만고만했고, 소위 '기예'라는 것도 엉성하기 짝이 없어 볼거리가 없으니 차라리 집에 가서 거울이나 보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취류화에 온 것도 그저 형식적인 인사에 불과했고, 체면치레도 끝났으니 미치광이들이 소란 피우는 걸 보느니 집에 가자며 의관을 정제하고 누각을 내려오던 터였다.
그렇게 층계를 내려오다가 마침 퇴장하던 큰 발 악사와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수레에 과일이 가득 찰 정도(掷果盈车): 중국 고사성어 '척과영거'. 진나라의 미남 반악이 외출하면 여인들이 흠모의 뜻으로 과일을 던져 수레가 가득 찼다는 일화에서 유래.
후야는 본디 풍진 여인들을 정면으로 쳐다보려 하지 않았으나 이자는 워낙 키가 멀대같이 커서 정면으로 보지 않으려면 눈을 까뒤집어야 할 판이었다.
눈앞에 들이닥친 짙은 화장의 귀신 면상에 기겁한 그는 속으로 대체 어느 잡귀인가 의아해하다가...… 어찌하여 어렴풋이 낯이 익은가 싶었다. 무뢰한들 앞에서도 여유만만이던 악사는 안색이 흙빛으로 변하며 두꺼운 분칠이 쩍 갈라질 듯 경악하더니, 두말할 것도 없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금이고 나발이고 내팽개치고 꽃신도 벗어 던진 채 미친 듯이 질주했다. 그 동정이 어찌나 요란한지, 증기 기관을 단 야생마가 엉덩이에서 하얀 연기를 뿜으며 내달리는 것 같았다!
향기로운 안개가 자욱한 취류화에 이토록 진귀한 신수가 사육되고 있을 줄 꿈에도 몰랐던 후야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번쩍하고 뇌리를 스치는 무언가를 깨닫고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얼굴이 새파래졌다.
좌우의 가솔들은 영문을 몰라 나리의 심장병이 또 도진 줄 알고 황급히 부축했다. "나리?"
가냘픈 버드나무처럼 휘청이던 후야가 콧구멍에서부터 쥐어 짜낸 기괴한 떨림의 괴성을 내질렀다. "잡아…… 저놈 잡아라……"
호위병과 가복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누, 누굴 잡으란 말씀이십니까?"
후야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단전에 기를 모아 포효했다. "저 천하의 호로자식을 당장 잡아와라!"
취류화 전체가 후야의 호통 한 자락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고, 잠시 후 만천하가 그 진상을 알게 되었다. 세상에 여러분, 방금 사람 놀래 죽일 뻔했던 그 '악사 처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다름 아닌 영녕후의 세자가 여장을 하고 나타난 것이었소!
사내대장부가 기방에서 여장을 하고 설친 것도 모자라 친아버지와 정면으로 마주쳤으니, 이보다 더 구경하기 좋은 굿판이 어딨겠는가!
이 영녕후 세자로 말할 것 같으면 과연 어떤 자인가?
이분의 이름은 해평奚平으로, 소문에 따르면 이 거대한 금평성에 수만 명의 방탕아들이 널려 있지만 그를 능가할 자는 단 한 명도 없다고 한다.
세자 나리께서 이번엔 아주 기상천외한 망나니 수법을 갱신하셨다. 뭇 도련님들이 취류화의 별실 감화간 한 장을 구하겠다고 피 터지게 싸울 때, 친히 무대에 올라 스스로 꽃이 되셨으니 어찌 '놀 줄 안다'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순간 취류화 안의 방탕아들은 집단으로 술이 깼고, 다들 호기심에 목이 두 치는 길어졌다. 단지 '비두공飞颅功'을 할 줄 몰라, 머리통을 밖으로 내던져 세자의 심야 여장 도주극을 직관하지 못하는 것이 천추의 한이 될 지경이었다.
세자 나리는 나풀거리는 덧소매를 펄럭이며 아버지의 수하들에게 쫓겨 꼴이 영락없는 거대한 나방이 되었다. 그는 걸리적거리는 치마폭을 무릎 위까지 찢어버리고, 커다란 두 맨발로 취류화에서 뛰쳐나와 서북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화방 나루터를 막 지나쳤을 때, 하필 병부시랑의 아들 왕보상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해평은 속으로 재수가 옴 붙었다며 욕을 씹어 삼켰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알고 보니 이 왕 공자 역시 구제 불능의 한량이었으나, 늘 본인이 꽤나 잘났고 영재라 착각하는 부류였다. 그 망할 '영재'께서 무과에 낙방하자, 부모가 돈을 발라 금위군 자리를 하나 꿰차게 해주었다. 그는 심심하면 기방에 들러 허풍을 떨다 기분이 동해 황주 두 잔이면 앞뒤 분간도 못 한 채 사람들 앞에서 '산을 뽑는' 흉내를 내며 난동을 부리기 일쑤였다. 심심찮게 곁에서 시중드는 아가씨들에게 고함을 지르거나 취김에 손찌검을 하는 터라 기녀들은 그가 오면 벌벌 떨며 속으로 '왕큰개'라 불렀다. 세자 나리와 왕영재는 끼리끼리임에도 영 구린내가 안 맞았는지, 마주치기만 하면 기싸움을 벌이며 으르렁대곤 했다.
때마침 왕보상은 넉 자 남짓한 좁은 골목길 어귀에 버티고 서 있었다. 그 우람한 덩치가 길의 절반 이상을 가로막고 있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했는지 창백한 풍등을 손에 들고 동태눈을 한 채 해평을 뚫어지게 쳐다볼 뿐 비켜설 줄을 몰랐다.
공교롭게도 그 순간 사악한 돌풍이 한바탕 휘몰아치더니, 골목 어귀의 증기 가로등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피식' 소리와 함께 한 줄기 연기를 뿜으며 꺼져 버렸다. 가로등 밑에 매달린 물총새 목각 인형은 석탄재에 그을려 새까매진 채 스산한 바람을 타고 음산하게 흔들거렸다.
해평은 코앞에서 맞닥뜨린 친아버지도 자길 못 알아봤는데 술떡이 된 왕큰개가 제 얼굴을 어찌 알아보겠냐며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행여나 귀찮은 일이 생길까 봐 얼굴은 가려두기로 했다. 그는 파릇파릇한 초록색 긴 소매를 휙 휘둘러 왕보상의 얼굴을 분내로 후려치고는 눈을 까뒤집으며 귀신 곡소리를 냈다. "이 배신자 놈아, 내 목숨 돌려내라——"
한밤중에 처녀 귀신에게 멱살이 잡힌 큰개 형님은 기절초풍하여 얼이 빠졌는지 한동안 넋을 놓고 있었다. 해평은 그 틈을 타 어깨로 그를 팍 밀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쏜살같이 장왕부로 도망쳤다.
장왕은 황귀비 해씨 소생의 셋째 황자였다.
귀비는 바로 영녕후의 친동생, 즉 해평의 친고모였다.
해평은 어린 시절 장왕 곁에서 몇 년간 글동무를 했던 터라 이 고종사촌 형과는 친형제처럼 허물없는 사이였다. 매를 맞을 일만 생기면 쪼르르 장왕부로 도망쳤으니, 후야라 한들 한밤중에 왕부의 대문을 부수고 들어가 자식을 내놓으라 행패를 부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단숨에 좁은 골목을 빠져나온 해평은 뒤를 쫓던 발소리가 어느새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뒤를 돌아보니 아버지의 앞잡이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어디로 튈지 뻔히 아는 터라 쫓아가 봤자 헛수고임을 깨닫고 아예 포기한 모양이었다.
기세등등해진 해평은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찰랑 넘기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너덜너덜해진 치맛자락을 경쾌하게 끌고 장왕부로 향했다.
초하룻날 밤은 달빛 한 점 없이 먼지와 수증기가 한데 뒤엉켜 끈적끈적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금가루 묻은 해평의 발자국을 덮은 뿌연 물안개는 능양하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올라 기계가 뿜어내는 증기와 뒤섞였고, 금평성 전체를 빈틈없이 옭아맸다.
한편, 영녕후부 사람들은 멀리서 울려 퍼진 귀신 곡소리를 따라붙다 왕보상과 마주쳤다.
왕보상의 얼굴은 그가 든 풍등 불빛을 받아 시체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눈치 빠른 후부의 가복 대장이 상대의 안색만 보고도 제집 도련님이 또 거나하게 사고를 쳤음을 직감하고 황급히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왕 공자. 방금 그 귀신은 저희 도련님이옵니다……. 술이 과하셔서 실언을 하셨으니 내일 날이 밝는 대로 후야께서 필히 도련님을 대동하고 사죄하러 가실 겝니다."
하지만 왕보상은 목석처럼 멍하니 선 채 묵묵부답이었다.
행여나 도련님 장난에 사람 하나 잡은 건 아닐까 간담이 서늘해진 가복이 조심스레 한 발짝 다가갔다. "왕 공자……"
이때, 조금 전 해평에게 치여 삐딱하게 틀어졌던 왕보상의 몸이 갑자기 뻣뻣하게 돌아갔다. 마치 녹슨 고철 기계처럼 삐걱거리더니 초점 잃은 눈동자가 반 바퀴를 굴러 허연 흰자위만 까뒤집혔다.
영녕후부 가복들은 대체 이 흉측한 표정이 무슨 의미인지 서로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혹여나 아까 도련님의 처녀 귀신 분장에 기겁한 나머지 이번엔 본인이 귀신 흉내를 내어 복수라도 하려는 심산인가?
장단에 맞춰 기겁해 주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왕보상의 입에서 뜬금없는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관을 일으켜 두 장의 휘장을 쳐라, 칠일 밤낮 영을 모시니——"
왕보상의 노래 실력을 비하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기괴한 노랫말은 맹세코 금평 영안 일대 촌구석에서 장례를 치를 때나 부르는 <환혼조>가 분명했다.
갈라지고 찢어지는 쇳소리는 마치 한밤중 까마귀 우는 소리처럼 처절해 듣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그는 곡소리에 맞춰 뻣뻣한 몸통을 끌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대도통천으로…… 돌아가는…… 길…… 에…… 컥!"
한 자 한 자 내뱉으며 걸음을 떼던 그가 '길' 자에 다다르자 노랫소리도 걸음걸이도 뚝 끊겼다. 버팀목 잃은 널빤지처럼 한순간 빳빳하게 굳어버리더니, 바닥을 향해 철푸덕 엎어졌다. 품에서 떨어져 나온 청옥패 하나가 돌바닥을 구르며 영롱한 마찰음을 냈고, 이내 두 자 남짓 밖으로 튕겨 나갔다.
사람은 미동조차 없었다.
한참의 정적이 흐른 뒤, 담력 좋은 가복 하나가 조심스레 다가가 왕보상의 어깨를 밀어보며 풍등 불빛을 들이밀었다. "왕 공자? 대체 어찌 되신…… 으아아악!"
가복은 짧은 비명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고, 놓쳐버린 유리 풍등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는 깨진 등이 아까운 줄도 모르고 엉덩이에 발이라도 달린 듯 혼비백산하여 바닥을 기어 몇 자나 뒤로 물러났다.
그의 손끝에 닿은 것은 온기 하나 없는 얼음장 같은 시신이었다. 빳빳하게 굳은 데다 하늘을 향해 꺾인 목덜미에는 이미 커다란 시반마저 선명하게 피어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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