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est 太岁(태세) 제5장 진강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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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岁》priest ^第5章^ 最新更新:2021-02-13 11:00:00 晋江文学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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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이거 안 마셔. 술이나 한 모금 줘." 해평은 소동이 올린 안신탕을 밀어냈다. 방금 전 지전이 문을 두드릴 때만 해도 어떻게 화유를 끼얹어 결사전을 벌일까 궁리했는데, 이제야 상황을 깨닫고 온몸에서 식은땀이 났다.
   화방 나루터에서 죽은 왕보상의 참상은 말로만 들었을 뿐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멀쩡한 산 사람이 지전에 감싸여 고깃덩이가 되는 광경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 아무리 대범한 심장이라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누를 수 없었다.


   몸과 마음이 나란히 싸늘하게 식자, 해평은 속으로 의아해했다. 어째서 또 자신인가?


   전날 화방 나루터의 일은 우연이라 할 수 있었다. 어쨌든 감화회는 떠들썩했고 향기로운 자든 구린 자든 모두 놀러 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홍려사경 댁의 동 공자는 또 어찌 된 일인가?


   이 시체는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하필이면 단계방에서 그와 마주치고 나서야 목청을 돋우었다. 설마 '여감선생'의 미명이 이미 구천지하까지 전해져, 강시조차 일부러 여기서 기다렸다가 그에게 한 곡조 뽑아 평가받으려 한단 말인가?


   이때 소동 하나가 허둥지둥 들어와 알렸다. "후야, 천기각 우부도통이 사람들을 데리고 방문했습니다!"
   영녕후는 흠칫 놀라며 약간 주저하다 말했다. "모셔라."
   말을 마친 그는 손을 뻗어 해평의 어깨를 밀었다. "들어가서 네 어미와 할머니를 뵙고 있거라."


   해평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소동이 다시 말했다. "존장께서 각별히 말씀하시길, 또…… 우리 도련님도 봬야겠답니다."


   하루 만에 인간행주에게 두 번이나 불려가자, 해평은 누군가 자기 집안 조상 묘에 호포를 꽂아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많은 푸른 연기가 솟아난단 말인가?*
   *호포(号炮)는 군대에서 신호를 보낼 때 쏘는 화포나 폭죽. '조상 묘에 호포를 꽂아 억지로 푸른 연기를 냈다'라는 것은 묫자리를 잘 써서 후손에게 큰 행운이 닥칠 때 쓰는 관용구인 '조상 무덤에 푸른 연기가 피어오른다(祖坟冒青烟)'를 비틀어 쓴 언어유희.
 

   천기각의 두 번째 방문은 기류가 좀 달랐다.


   아침만 해도 태도가 자애롭던 조예는 마치 그를 모르는 사람처럼 굴며 그가 어딜 갔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누구와 몇 마디를 나눴는지 일일이 캐물었다. 그리고 곁에 있는 어림군에게 빠짐없이 기록하게 하더니 잠시 후 이를 대조하며 한 명씩 찾아가 조사하려는 눈치였다.
   은빛 허리띠를 두른 방 도통은 칼날 같은 두 눈으로 그의 몸을 몇 번이나 훑어 내리며, 마치 그의 오장육부를 갈라 속속들이 살펴볼 기세였다.


   해 도련님은 털을 쓸어줘야 얌전해지는 나귀 같은 성정이라, 심기가 불편하면 가차 없이 뒷발질을 했다. 하물며 저 방씨 성을 가진 자는 조금 전 그를 담장에서 떨어뜨리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그는 무표정하게 시선을 맞받아치며 다분히 도발적으로 방 도통의 두 눈을 응시했다.


   방전은 그의 눈총을 받고 오히려 웃었다.
   영 만만찮아 보이던 사내가 뜻밖에도 웃는 눈매를 지어 보이며, 온화한 낯빛으로 물었다. "세자, 그 두 망자와 잘 아는 사이인가?"


   해평이 대답했다. "왕사독이야 고개만 들면 마주치는 사이였고, 동자서는 잘 모릅니다."


   "동 대인 댁의 낭군은 풍채가 빼어나고 국자감에서 글을 읽는 수재라, 이런 불초한 것과는 어울린 적이 없습니다 ." 영녕후가 때맞춰 말을 자르고 들어와 해평을 가리키며 말했다. "늘 말하지만, 이 업보가 그를 조금이라도 닮는다면 제 수명이 몇 년 줄어도 좋습니다. 한데…… 동가에서 이런 참변을 당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 댁 장남이 올해 선문에 들 게 십중팔구라 하였건만……. 에효, 이래서야 부모를 산 채로 묻는 격 아니겠습니까?"


   '업보' 해평은 눈을 내리깔고는, 시선이 가려진 틈을 타 몰래 눈을 흘겼다.


   동씨 집안의 가풍은 청렴결백하고, 동 대공자는 정인군자라 함부로 밖으로 나돌며 방탕하게 구는 법이 없었다. ……그저 성 밖에 '홍안지기*'를 몰래 숨겨두었을 뿐.
   마침 올해 대선이 열린다는 것을 알기라도 한 듯, 그 홍안은 연초에 찬 바람을 좀 맞더니 알아서 목숨을 거두어 주었다.
   듣자 하니 동 공자는 그녀를 잃고 크게 상심하여, 무려 사흘 동안이나 백옥 비녀를 꽂고 다니며 애도를 표했다고 한다.
   *홍안지기(红颜知己): 속마음을 깊이 나눌 수 있는 절친한 여성 친구.


   매일 엄살을 떠는 후야를 제외하면, 해평은 진정 연약한 꽃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아무튼 그는 멀쩡한 산 사람이 찬 바람 한 번 맞았다고 숨이 멎어버리는 현상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금평은 겨울에도 춥지 않았다.
   차라리 시중에 도는 또 다른 소문이 훨씬 더 그럴싸했다. 듣자 하니 그 홍안은 유산을 시키는 독한 약을 먹고 죽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해평은 아버지가 자신을 이번 사건에서 떼어놓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눈치채고, 입을 다문 채 경솔하게 일을 그르치지 않았다.


   조예가 표정 변화 없이 영녕후의 말에 장단을 맞추며 탄식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방전은 아예 못 들은 척 여전히 해평을 응시하며 물었다. "세자의 맥을 좀 짚어봐도 되겠나?"


   마음대로 짚으시라지. 해평이 손을 내밀며 속으로 혀를 찼다. 어디 회임이라도 했다는 희맥을 잡아낼 셈인가?
   얕은 굳은살이 박인 두 손가락이 그의 맥문에 가볍게 얹혔다. 이내 아주 가느다란 열기가 경맥을 타고 그의 사지백해로 흘러들자 해평은 잠시 몸을 떨었다.


   영녕후의 눈가에 서려 있던 웃음기가 바로 가라앉더니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존장, 제 아들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별거 아니오." 방전이 여유롭게 손을 거두었다. "젊은이가 놀기 좋아해서 밤을 밥 먹듯 새우나 보군. 기혈이 조금 허하오."


   후야의 낯빛이 살짝 풀렸으나 방전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나, 나 역시 반쪽짜리에 불과하고 세자는 오늘 어쨌든 한 수레의 시독과 스쳐 지나갔으니 만전을 기하는 것이 좋겠소. 세자가 우리와 함께 천기각으로 가 하루를 머물며 철저히 검사를 받는 편이 안전할 것 같네."


   이게 무슨 뜻인가?
   검사를 하겠다는 건가, 조사를 하겠다는 건가? 사람을 정중히 모셔가겠다는 건가, 아니면 잡아들인다는 건가?


   후야의 안색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어제 화방 나루터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시체와 마주쳤으나 다들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아들놈이 워낙 철이 없으니 굳이 폐를 끼치진 않겠…… "
   해평이 그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러지요. 언제 갑니까? 소동을 데려가도 됩니까?"


   후야는 할 말을 잃었다. "……"


   영녕후 등 뒤에 가려져 있던 해평에게 여러 시선이 쏠렸다. 해평은 좋은 말과 나쁜 말을 분간 못 하는 머저리처럼, '천기각에 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로 대수롭지 않게 후야에게 말했다. "아버지, 가게 해주세요. 전 아직 천기각 한 번도 못 가봤단 말입니다."


   "까불고 있구나!" 영녕후가 고개를 돌려 질책했다. "천기각이 어디 놀러 가는 곳인 줄 아느냐!"
   "하룻밤 자고 오는 건데 뭐 어때서요. 제가 자다가 이부자리에 오줌을 싸는 것도 아니고."


   영녕후는 화가 나 수염이 파르르 말려 올라갈 지경이었다.
   해평이 연이어 말했다. "전 지금 눈만 감아도 그 강시…… 그 동 형이 대체 왜 저한테 눈짓을 했는지 생각나서 온몸에 소름이 돋습니다. 이대로 자면 무조건 악몽을 꾸겠지요. 그냥 존장님께서 절 데려가게 해주세요. 천기각 가서 선기라도 좀 쐬면 담력이라도 커지지 않겠습니까. 호종만 데려갈 테니 존장님들께 폐는 끼치지 않겠습니다…… 침구는 제 걸 가져가면 됩니까, 존장?"


   방전이 미소 지었다. "총서에 객실이 있다."
   해평은 그 말을 듣자마자 영녕후가 입을 열기도 전에 제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좋습니다! 당장 사람을 시켜 짐부터 챙기라 하죠!"


   영녕후부의 이 외동아들은 어릴 적부터 천방지축이라, 때려도 굴복하지 않고 달래도 듣지 않으며 무르게 나가든 강하게 나가든 모두 통하지 않았다.
   평소 후야가 가법*을 핑계로 몽둥이를 들고 쫓아오면 그가 순순히 두어 바퀴 도망쳐주는 건 순전히 아버지의 체면을 살려주는 동시에 어르신께서 근육을 좀 풀게 해드리려는 배려에 불과했다. 정말로 본인이 마음먹고 고집을 부리면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대답을 마친 해평은 솥뚜껑처럼 새까매진 후야의 얼굴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번갯불에 콩 볶듯 하인들을 닦달해 행장을 꾸리고는 즐겁게 천기각 마차에 올라탔다. 떠날 때 즈음 그는 속도 없이 마차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후야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버지, 내일 점심은 돌아와서 먹을 테니 배 좀 든든하게 채울 만한 요리로 준비해 주십시오! 삼전하 댁엔 죄다 맹물 아니면 죽이라 하루 종일 배를 곯았단 말입니다!"
   *가법(家法):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규율이나 예법 / 가정에서 쓰는 회초리나 벌 도구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만약 외부인만 없었더라면, 영녕후의 욕설이 능양하 양쪽 둑을 쩌렁쩌렁하게 울렸을 것이다.
   방전은 그가 장왕을 입에 올리는 것을 듣고 눈빛을 미세하게 빛내더니 웃으며 말했다. "안심하시오. 세자를 굶길 일은 없을 테니."


   인간행주들은 불길처럼 들이닥쳤다가 바람을 타고 떠났다. 뒤에는 철갑을 두른 어림군만이 남아 단계방을 물샐틈없이 포위하며 또 다른 변고에 대비했다.
   남쪽 거리에서는 집집마다 담력 좋은 하인들을 내보내 대문 앞의 오물을 치우고 있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천기각이 해평을 연행해 가는 모습을 보았다. 다만 대갓집 하인들은 하나같이 언제 벙어리와 귀머거리 행세를 해야 하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 다들 힐끗 쳐다볼 뿐 냉큼 고개를 숙이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중년 사내 하나가 제집 앞 계단을 깨끗이 치우고 부적 재를 뿌린 뒤 동료들과 함께 집사에게 수고비를 받고는 오늘 밤 문지기로 숙직을 서겠다고 자청했다.


   밤이 더욱 깊어지자 남쪽 거리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간혹 철야를 서는 어림군의 무기와 갑옷이 부딪혀 '챙그랑' 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퍼질 때면,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의 선잠을 깨웠는지 모를 일이었다.
   중년 사내는 안채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품에서 나무로 만든 '평안무사平安无事'패를 꺼냈다.
 

   그는 가느다란 바늘 끝에 물을 묻혀 목패 위에 글을 썼다. [각수탑에서 곡소리를 듣고 눈 깜짝할 사이에 여섯 명이 도달했소. 해는 연행되었소.]


   글씨체는 갓 붓을 쥔 아이처럼 삐뚤빼뚤했다. 물이 목패에 닿아도 속으로 스며들지 않더니, 마지막 획을 다 쓰자마자 그는 제 검지를 깨물어 핏방울을 목패 위에 찍어 눌렀다. 그 순간, 물로 쓴 글자와 핏자국이 한꺼번에 목패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목패의 표면이 처음처럼 매끄러워졌다. 


   잠시 후, 목패가 미세하게 달아오르더니 허공에서 물로 쓴 두 글자가 배어 나왔다. 반듯한 해서체로, 명백히 다른 사람의 필체였다. [계획대로.]
   하인의 손에 쥐인 저 볼품없는 평안무사패가 놀랍게도 타인과 서신을 주고받을 수 있는 선기仙器였던 것이다!


   중년 사내는 두 눈을 감고 탁한 숨을 가볍게 내뱉었다. 그제야 목패 위의 물기를 닦아내고 다시 글을 적었다. [삼십이 형은 소원대로 순도*하였소.]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피를 묻혀 그 문장을 전송하고는 떨리는 손가락을 애써 억누르며 한 획 한 획 목패 위에 새겼다. [큰 불이 걷히지 않으니, 매미 소리 끝없구나.]
   *순도(殉道): 도(道), 즉 자신이 믿는 신념이나 대의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치는 것. 순교.
 

   목패가 잠시 침묵하더니, 맞은편 사람의 답신이 돌아왔다. [서리 맞아 죽을지언정 뜻을 저버리지 않으리.]


   이 시각, 천기각에 연행된 해평은 아주 태평했다.
   그는 어딜 가나 자유롭고, 어색함을 모르는 기질을 타고난 것 같았다. 마차 안에서도 아주 방자한 시선으로 방전을 관찰했다. 항간에 천기각 수장은 폐관 수련 중이라 하니, 현재 수도 방위를 통솔하는 이 우부도통이 실세 중의 실세인 큰 인물이었다. 평소엔 이런 거물을 구경하고 싶어도 볼 길이 없으니 이왕 온 김에 봐둬서 나쁠 게 없었다.
   방전은 단정히 앉은 자태부터가 강철 창대처럼 꼿꼿했다. 무릎에 얹은 두 손은 뼈마디가 도드라졌고 손목을 휘감은 푸른 핏줄이 조용히 똬리를 틀고 있었다. 손끝과 손바닥은 온통 굳은살 투성이에, 손등에는 오래된 흉터들이 울퉁불퉁 얽혀 있었다. 곁에 눈은 코를 보고 코는 입을 보며 점잖게 앉은 조예는 그를 몹시 깍듯하게 대했다. 저 청년의 용모 뒤에 있는 조예의 진짜 정체가 '조 어르신'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해평은 참지 못하고 속으로 가늠했다. '이 방 부도통은 대체 나이가 몇 살이란 거야?'


   방전이 물었다. "세자, 묻고 싶은 게 있나?"
   해평이 넉살 좋게 치아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방 도통께서 바닥에 깃발 하나를 던져 남쪽 거리의 석판을 깨부수고 꽂으시던데, 보아하니 저보다 몇 살 많아 보이지도 않으십니다. 대체 어떻게 수련하신 겁니까?"


   방전이 답했다. "딱 자네보다 나이가 많은 그 몇 년 동안 수련한 거지."


   "그래서 그게 몇 년입니까?"
   방전이 느릿느릿 대답했다. "몇 년 안 된다. 한 갑자*쯤 돌고 조금 더 꺾인 정도지."
   *동양의 육십갑자(六十甲子)가 한 바퀴 도는 60년을 뜻한다.


   "……"
   실례가 많았습니다, 방 어르신!

   "내 참으로 궁금한데, 보통 사람이라면 한밤중에 천기각으로 연행될 때 대개 긴장하기 마련이거늘." 방전이 해평을 살폈다. "후야께서도 저리 근심하시는데 세자는 정녕 두려움이 한 자락도 없는가?"
   "그거야 우리 집 후야께서 소심하셔서 그런 것이니, 존장께서도 같은 수준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 해평은 뼈 없는 사람처럼 다리를 쩍 꼬고 앉았다. "이틀 연달아 저와 눈만 마주치면 강시가 되어 날뛰는데 세상에 그런 우연이 어딨습니까. 제가 정말 깨끗지 못한 것이라도 묻어온 거면 어쩌지요?"


   방전은 그가 속내를 직설적으로 꺼낼 줄 몰랐던 터라, 눈썹을 살짝 위로 치켜올렸다.


   해평이 덧붙였다. "어제 왕 큰…… 왕사독처럼 저 혼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버리는 거면 몰라요. 그쯤이야 까짓것 훗날 악귀가 되어서 직접 복수하러 가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오늘 저 동 형처럼 죽기 전에 길동무를 무더기로 만들어버리면 어떡합니까? 우리 집 후야야 도망칠 다리라도 멀쩡하시지만, 집에는 일흔을 훌쩍 넘긴 노조모도 계십니다. 보험 드는 셈 치고 제가 천기각에 올라 옥살이를 하는 게 낫지요."


   말이 점차 도를 넘었다. 조예는 장왕을 보아서라도 그를 감싸주려 했기에, 이 망발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옆에서 헛기침을 했다.
   방전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감옥까지 갈 일은 없다."


   해평은 눈알을 굴리더니, 거침없이 내뱉고는 또 영리하게 덧붙였다. "저도 알죠. 우리 삼전하 체면을 봐서라도 존장들께서 저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으실 거라는 걸요."
 

   방전은 실로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처음 영녕후 세자를 보았을 때는 금은보화나 두른 바보인 줄 알았다. 그러다 떠날 때 의도적으로 장왕을 끌어들여 자신에게 보험을 두는 걸 보니 잔꾀를 부릴 줄 아는 어린 공자 같아 약간의 반감이 일 뻔했다. 그런데 방금 이놈이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아주 당당하게 배짱을 부리는 꼴은, 앞서 보여준 바보 행세나 얕은 계산 따위를 단번에 상쇄해 버리기에 충분했다.
   '대담하고 방자하되 어리석진 않군.' 방전은 속으로 해평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타고난 자질이 출중한 놈팡이로다.'


   천기각은 해평을 꽤 정중히 대접했다. 객실로 안내하더니, 과연 굶기지 않고 밤참과 안신탕을 내왔다.
   그를 안내한 남의인이 온화한 낯빛으로 일러주었다. "우리는 수행하는 자들이라 거처가 청빈하여 후부에 비할 바는 못 됩니다. 하나 이곳에서 하룻밤 묵으면 마음이 맑아지고 온갖 병이 사라지니, 세자께서 악몽을 꿀 염려는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해평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그 존장에게 실없이 웃어 보이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이 몸이 바로 그 온갖 병이 되겠지.'


   하지만 그는 스스로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설사 정말 '병'이 있다 해도 그것은 남이 해친 것이다. 피해자가 기죽을 이유가 무언가? 그리하여 아주 당당하게 시동 호종을 불렀다. 두 혈기 왕성한 장정은 서너 명을 배불리 먹일 분량의 밤참을 남김없이 해치웠다.


   이 주종 두 사람은 퍽 태평하여, 배불리 먹고 마시자마자 한 명은 안방, 한 명은 바깥 방에 자리를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쥐 죽은 듯 기척이 사라졌다.
   천장에 매달린 증기 유리등은 사람들이 잠든 것을 알기라도 한 듯 스스로 불빛을 낮추었다.


   비몽사몽간에, 해평은 사방에서 무언가 자신을 빤히 주시하는 듯한 기운을 느꼈다. 그러나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도저히 뜰 수가 없어서, 아예 몸을 뒤척여 시선들이 마음껏 감상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사방의 벽에서 황혼 무렵의 노을빛 같은 어스름한 광채가 뿜어져 나오더니 벽면 위로 기괴한 '벽화'가 배어 나왔다. 대안등* 같이 큰 눈을 가진 괴수들이 그려져 있었다. '벽화' 속 괴수의 눈알이 기이하게 움직이더니 도록도록 굴러가는 눈동자를 따라 여러 줄기의 시선이 해평의 몸 위로 쏠렸다.
   *대안등: 눈이 커다란 등불(호롱불), 왕눈이
 

   이내 괴수들은 눈뿐만 아니라 몸뚱어리까지 벽 위를 종횡무진 누비며 해평의 주위를 빙빙 맴돌기 시작했다.


   돌연 그중 한 마리가 무언가 냄새라도 맡은 양, 벽에서 침대 휘장으로 훌쩍 뛰어오르더니 '벽화'에서 휘장의 '자수'로 변했다.
   이 흉악한 '자수' 덩어리는 휘장을 타고 이불 겉면으로 기어 올라가 급기야 해평의 가슴팍 위에 찰싹 엎드렸다!


   바로 그때, 해평이 마침 몸을 뒤척였다. 몸 위에서 무언가 떨어져 등을 배기자 그는 짜증스럽게 몸을 틀어 그 물건을 한쪽으로 치워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이불 속으로 웅크려 들며 괴수의 날카로운 송곳니 밑으로 곧장 얼굴을 들이밀었다. 마치 얼굴로 괴수의 침이라도 받아먹으려는 꼴이었다.
   엉겁결에 코끝을 마주하게 된 왕눈이 괴수는 오히려 당황한 듯 살짝 뒤로 물러났다. 머뭇거리며 한참 동안 냄새를 맡아보던 괴수의 얼굴에서 흉폭한 기색이 점차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놈이 동료들을 부르자 이불 겉에서 침상으로 괴수들이 모여들었다. 불려 온 괴수들은 뿔뿔이 흩어져 휘장 안을 샅샅이 뒤졌고, 잠시 후 '왕눈이' 하나가 해평이 등 배긴다며 침대 구석으로 밀쳐둔 작은 비단 주머니를 찾아냈다.


   '왕눈이'가 다가가 냄새를 맡더니, 마치 똥 덩어리라도 마주한 것처럼 기겁하며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놈은 머리를 세차게 털어내고는 해평을 향해 '쒸익' 콧바람을 내뿜으며 그가 똥을 싼 게 아닌가 의심했다.


   눈이 큰 괴수들이 일제히 다가와 비단 주머니를 에워쌌다. 놈들은 소리 없이 잠시 교감을 나누더니 이 물건이 지독하게 구린내는 날지언정 해로운 물건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해평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반 시진 동안 샅샅이 검사한 뒤에야 괴수들의 신형은 벽과 이불 사이에서 점차 옅어졌다. 기괴한 벽화와 자수가 사라지고 황혼 빛이 어두워지며 방 안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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