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마는 땅에 발이 닿자마자 백옥 조각으로 변했고, 방 도통 역시 어느 선존을 뵈러 갔는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입구에는 제자들을 맞이하는 반선 한 분이 계셨는데, 자신을 신성 장공주의 아들이자 지난 기수 대선에 입문한 양안례杨安礼 사형이라 소개했어요.]
[양 사형은 무척 온화한 성정으로 삼형을 조금 닮았어요. 물론 우리 삼형에게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요.]
금평에 밤이 내렸다. 장왕부의 남서재 안에서 주영은 해평이 후부로 보낸 것과 똑같은 백옥지척을 손에 들고 있었다. 애초에 그 백옥지척은 한 쌍이 아니라 세 개가 한 벌이었던 것이다.
이즈음 해평은 잠수사에 대강 자리를 잡고 할머니에게 장문의 서신을 쓰기 시작한 모양인지, 백옥판 위로 쉴 새 없이 글귀들이 떠올랐다.
왕검은 곁에서 태연히 바둑 기보를 늘어놓으며, 자신의 주상이 해세자가 조모에게 보내는 서신을 훔쳐보는 일 따위는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닌 양 굴었다.
해 노부인은 젊은 시절 문 밖을 나서지 않던 전형적인 규수였기에 글공부가 깊지 않았다. 이를 아는 해평은 아주 알기 쉬운 일상어만 골라 썼고,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까지 곁들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사문 앞에는 청란과 백록이 뛰어다녀요. 청란이라는 새는 크기가 반 자에 불과한데, 꼬리 깃털은 망토처럼 깁니다.]
그 아래에는 퍽 생동감 넘치는 청란의 그림이 곁들여져 있었다. ……비록 화공이 거칠어 엉덩이에 부채를 꽂은 오리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장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문 안의 시종들은 사람이 아니라 영석으로 부리는 짚인형으로, '도동稻童'이라 불러요. 길을 안내하거나 마당을 쓸고, 징을 쳐서 시간을 알리는 등의 일을 하는데 그에 맞는 부적을 도동의 뒤통수에 붙여주기만 하면 스스로 움직여 일을 해요. 손자가 훗날 이 도동을 만드는 법을 배우면 꼭 할머니께 한 무리를 만들어 드릴게요. 다리 주무르는 놈 하나, 부채질하는 놈 둘을 두고, 아예 극단도 하나 꾸릴 거예요.]
장왕이 소리 내어 웃었다. "외할머니께서 유독 그 녀석만 편애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할머니 비위 맞춰드리는 재주 하나는 나보다 탁월하군."
왕검이 장단을 맞추었다. "'자도 짧을 때가 있고 치도 길 때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르신들의 총애를 다투는 일이라면, 확실히 전하께서 한참 미치지 못하시지요."
*원문 '尺有所短,寸有所长'. 자(尺)도 짧을 때가 있고 치(寸)도 길 때가 있다는 뜻. 누구에게나 장단점이 있다는 성어. 자는 약 33cm정도고 치는 자의 1/10으로 약 3.3cm 정도.
백옥지척 위로 아부를 한바탕 쏟아낸 해평은 이어서 잠수사의 식사를 품평했다. 전반적으로는 매우 만족스럽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하루에 아침저녁으로 두 끼만 내어주니 제자들은 다과나 야식을 즐길 길이 없어요.]
먹는 이야기가 끝나자 이번에는 처소에 대한 평이 이어졌다. [이곳은 남녀 제자의 거처가 나뉘어 있어, 일상적인 학업이나 생활 중에 마주칠 일이 없어요. 안타깝고 애석한 일입니다! 여제자는 한 명당 하나의 독채를 쓰지만, 남제자는 머릿수가 많은 탓에 두서너 명이 한 채를 함께 써요. 손자는 '구丘' 자 원에 배정되어 두 명의 동문과 함께 지내게 됐답니다."]
[한 명은 상 태부*의 장손인 상常형으로, 둥글넓적한 얼굴에 성격이 무척 살갑습니다. 흠이 있다면 입이 가벼워서 짐을 푼 지 이 각도 지나지 않아 여덟 가지 소문을 퍼뜨렸으니 마치 나팔이 요괴가 된 것 같습니다.]
*태부(太傅): 삼공(三公)의 하나로, 천자를 보좌하는 최고위 관직.
장왕은 속으로 생각했다. '남의 입 가벼운 걸 탓할 처지가 아닐 텐데. 내가 보기엔 네 입부터 꿰매야 할 것 같다.'
왕검은 그의 기분이 드물게 좋아 보이자 눈치껏 찻잔에 물을 채워 올리려 했다. 그러나 찻주전자를 들어 올리는 순간, 장왕의 얼굴에서 미소가 차갑게 식는 것을 보고 슬쩍 백옥판 위를 훔쳐보았다.
그곳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다른 한 명은 태사령*의 아들이자 태자비의 서제** 요姚형이에요. 이 형님은 손자와 한 처소를 쓰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지레 겁을 먹고 밤새 측간을 일곱여덟 번이나 들락거렸고, 하마터면 속을 다 게워낼 뻔했죠. 손자는 그 모습에 심히 송구하고 불안하여, 앞으로 더욱 각별히 친분을 다져볼까 합니다.]
*태사령(太史令): 천문 관측과 역법 편찬, 국사 기록 등을 맡은 관직.
**서제(庶弟)는 첩(妾)에게서 태어난 남동생. 태자비와 아버지는 같지만 어머니가 다른 동생.
장왕이 손가락으로 백옥 석판을 쓸어내렸다. "태자의 처남이라……."
왕검이 재빨리 말했다. "과거 승은후 장씨 일가가 화를 입은 이후로 동궁은 줄곧 몸을 낮춰왔습니다. 태자비의 출신이 한미한 데다 요씨 가문은 더더욱 조심성이 많지요. 이번에 잠수사로 들어간 요씨 가문의 둘째 공자 역시 금평성 내에서 이렇다 할 존재감이 없던 자이니 남의 이목을 끌 만한 성정은 아닐 것입니다."
장왕이 "음" 하고 받았다. "나도 안다. 해사용 그 망나니 녀석이 집 안에서는 미움을 사도 밖에서 남에게 괴롭힘을 당할 걱정은 안 해도 돼…… 그저 제 성질을 못 이겨 함부로 말썽만 피우지 않으면 다행이련만."
왕검이 웃으며 말했다. "전하, 염려 놓으십시오. 이번에 잠수사로 들어간 제자들 중 대성의 적장자는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사전하와 구전하를 제외하면 임씨 가문의 자제 한 명이 전부지요. 임씨는 사전하의 외가이니 굳이 세자와 다툴 일은 없을 것이고, 구전하는 어린 데다 성정이 유약합니다. 그러니 이번 내문 인선은 별 다른 변수가 없을 듯합니다. 사전하께서는 매사에 주도면밀하시니 그분이 계신 이상 다른 자들이 풍파를 일으키진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속세에 머무실 때 전하와 각별한 우애를 나누셨으니 틀림없이 전하를 보아 해세자를 잘 거두어 주실 겁니다."
"각별할 것까지야. 주서周樨는 어릴 적부터 자신이 선문에 들어갈 운명임을 알아서 우리 같은 범인들과는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그저 제 어미를 보아 누구와도 섣불리 척을 지지 않았을 뿐이지." 장왕이 코웃음을 쳤다. "물론 무모하게 행동할 위인은 아니다만……. 음?"
백옥 지척의 여백이 거의 다 차가고 있었다. 해평은 미처 못다 한 말이 남아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으나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끝을 맺어야 했다. 그러다 구석진 자리에 한 줄을 덧붙였다. "천기각의 방 도통과 손자가 제법 마음이 맞아, 그분이 반인반우 형상의 어린 하인 하나를 선물로 주셨어요. 사연이 몹시 기니 내일 할머니께 자세히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방? 방문창?" 장왕은 '마음이 맞았다'는 글귀를 보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쩐지 자신들이 해평을 예비 명단에서 빼놓았음에도 영녕후부가 징선첩을 받게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사람이었군?"
"방 대인은 겉보기엔 온화하나 속을 알 수 없는 자로 유명합니다. 어르고 협박해도 통하지 않으며 누구의 체면도 봐주지 않으니, 수많은 명문가에서 줄을 대려 해도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지요." 왕검이 말했다. "세자께서 이미 잠수사에 발을 들이셨으니 훗날 돌아오시면 분명 천기각에 입문하시게 될 겁니다. 이왕 이리된 바에야 그의 눈에 드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지요."
장왕은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방전 같은 고독한 늑대가 누군가에게 '어린 하인' 따위를 선물할 위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천기각의 우부도통이 평범한 인간 하나를 짓밟는 것은 개미굴을 밟고 지나가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굳이 이제 막 입문한 어린 제자에게 무슨 수작을 부릴 이유도 없을 터였다. ……아마도.
"단오에 방 도통에게 보낼 명절 예물도 빠뜨리지 말거라."
왕검이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백옥 지척 위의 작은 물고기가 제 혼자 헤엄을 치기 시작하더니 해평이 남긴 글귀와 그림을 말끔히 지워냈다. 노부인 쪽에서 답장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장왕은 지척을 내려놓고 왕검을 향해 말했다. "오늘 초楚나라 사신들이 당도했다지."
왕검이 곧바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기차 건 때문입니까?"
"그래. 폐하께서는 육로 수송망을 넓히겠다는 의지가 확고하시다. 대완 영토 내에 몇 개뿐인 미진 역참만으로는 그분의 뜻을 채우지 못하시는 게지. 이번엔 아예 초나라의 동형东衡까지 철로를 이을 작정이신 모양이다." 장왕이 말하는 동안 그의 얼굴에는 다시 차가운 이성이 내려앉았다. 그 그림이 곁들여진 백옥지척만이 아주 잠시나마 그의 미간에 앉은 서리를 걷어낼 수 있었던 모양이다. "동형의 항项씨 일가는 이단아들이니 오히려 폐하와 뜻이 아주 잘 맞았겠지."
왕검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운 쪽은 무어라 합니까?"
증기 기관의 매연은 금평의 하늘을 탁하게 만들었지만, 조운을 쥐락펴락하는 자들의 주머니는 두둑하게 불려주었다. 거대한 대운하 하나에 얼마나 많은 대세가들이 들러붙어 피를 빨고 있는가. 그들이 땅 위를 달리는 '등운교'가 제 몫을 나누어 가지는 꼴을 용납할 리 없었다.
"조운이라? 하, 사신들이 떠나기도 전에 땅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통곡하고 싶을 게다. 철로가 '산을 뚫고 숲을 훼손하여 풍수를 망치고 국운을 해친다'며 앓는 소리를 해대겠지. 당장 현은산 선존들을 모셔다 시비라도 가려 달라고 생떼를 쓰지 않는 게 다행일 정도다." 장왕이 옅게 웃었다. "조운사의 손우경 대인, 참 인재야."
왕검이 고개를 저었다. "손씨 가문은 탐욕스럽고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기회만 엿보는 자들입니다. 예전에는 승은후에게 아부하더니 그가 무너지자 이제는 동궁과 엮일까 봐 선을 긋고 있지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왕의 눈가에 서늘한 웃음기가 번졌다.
왕검이 물었다. "왕야, 혹시 소생에게 하명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장왕은 손을 뻗어 입술을 가리고 고개를 돌려 가볍게 기침을 몇 번 했다. "과거 금평에서 유주俞州로 이어지는 철로를 놓을 때,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의 농토를 강탈하여 조정에 고가로 팔아넘겼던 사건을 기억하는가?"
"예, 훗날 솜방망이 처벌로 몇몇을 내치고 흐지부지 덮었지요. 그 땅이야…… 이미 조정이 차지했으니 당연히 돌려줄 리 만무했습니다." 왕검이 말했다. "전하, 설마……"
"등운교가 위풍당당하게 달리는 건 좋지만 삶의 터전을 잃은 그 가엾은 백성들은 앞으로 무얼 의지해 살아야 한단 말인가. 가련한 일이지." 장왕은 자기에 내려앉은 먼지를 불어내듯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손 대인에게 귀띔이라도 좀 해주어라. 매일 남성을 찾아 하소연할 궁리만 하지 말고…… 여기 이렇게 번듯한 '정도'가 있지 않냐고 말이야."
왕검은 그의 깊은 뜻을 알아차리고 대답했으나, 곧 의문을 표했다. "하오나 왕야, 폐하께서는 매사에 마음이 철석같으신 분입니다. 고작 터전을 잃은 백성 몇 명의 호소로 폐하를 막아설 수 있을런지요……"
"내가 어찌 아바마마를 막는단 말인가? 기차가 오가든 배가 오가든, 두문불출하는 나 같은 병자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장왕이 피로한 기색으로 소매를 떨쳤다. "그건 태자의 일이다."
"태자 전하 말씀이십니까? 태자께서 어찌 그런 진흙탕에 발을 들이시겠습니까?"
"그야 그의 뜻대로 되지 않을 테니까." 장왕은 손끝으로 투박한 도자기 잔을 만지작거리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결국 태자에게 남은 것이라곤…… '박인*'이라는 명성뿐이지 않느냐."
*어질고 덕이 높다(博仁)
말을 마친 그는 턱을 괸 채 무심코 곁에 둔 백옥지척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해 노부인은 이미 큼지막한 글씨로 한바탕 당부를 늘어놓은 뒤였다. 할머니의 당부야 늘 그렇듯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말썽 피우지 말라'는 세가지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장왕이 무심히 시선을 거두려던 찰나, 노부인이 남긴 마지막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요괴 같은 짚인형 따위는 필요 없다. 밤중에 마주치면 놀라잖니. 선문에서 단약 짓는 법을 가르쳐준다면 좋겠구나. 네 삼전하를 위해 눈여겨보았다가 꼭 배워오너라.]
장왕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아주 짧은 순간, 그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며 시선이 노부인의 글귀에 데이기라도 한 듯 그 자리에 멎어버렸다. 한참 뒤에야, 그는 조용히 지척을 뒤집어 엎어두고는 왕검을 향해 물러가라 손짓했다.
잠수사에 홀로 남은 해평은 할머니와 통신을 마친 뒤 백옥지척을 챙겨 넣고 억지로 눈을 붙이려 자리에 누웠다.
잠수사는 현은 산맥의 가장 바깥쪽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창울한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른 물결처럼 굽이쳤고 윙윙거리는 기계음이나 시끄러운 톱니바퀴 소리도 없었으며 방 안에는 흔한 자명종조차 없었다. 제자의 방에 걸린 것이라곤 반 자 남짓한 청옥 역패뿐이었는데, 매일 자정이 교차할 때마다 날짜와 절기, 그날의 날씨를 저절로 갱신하는 정교한 선기였다.
산속은 너무도 고요했다. 그 지독한 적막에 잠자리를 설친 해평은 밤새 어지러운 꿈에 시달렸다. 귓가에 끊임없이 환혼조가 맴돌며 밤새도록 상을 치르는 듯했다.
묘시, 벽에 걸린 역패에서 돌연 눈부신 백광이 뿜어져 나왔다. 이어 작은 방 안을 뒤흔드는 벼락 소리가 터져 대들보가 가늘게 떨렸다.
해평은 이 청천벽력에 혼비백산하여 침상에서 굴러떨어졌다. 온몸을 더듬어보며 사지가 멀쩡히 붙어 있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간신히 진정하고 역패를 바라보았다.
역패의 날짜는 어느새 4월 16일로 넘어가 있었다. '하늘은 맑고 구름은 푸르게 늘어졌다' 문구 아래에 깜빡이는 금빛 글씨 한 줄이 나타나 소리 없이 재촉했다. [의용을 정제하고 묘시 삼각에 건곤탑 조과*에 참석할 것.]
*아침수업
평소 이 시각이면 도련님은 아직 잠자리에 들지도 않았을 시간이었다.
게다가 의용을 정제하라니…… 유용을 정제하라는 것이 낫겠다.*
*유용은 시신의 얼굴을 뜻하고 중국어로는 의용(仪容, yí róng)과 유용(遗容, yí róng)발음이 같다.
해평은 역패를 마주 보고 앉아 한참 동안 참선을 하다가 곧장 침상 위로 다시 쓰러져 자려 했다.
그러나 뺨이 베개에 닿기 무섭게 역패에서 두 번째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이번에는 아예 해평의 머리통에 직접 벼락을 내리꽂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본래 남들보다 청각이 예민한 해평은 청력을 잃을 뻔했다. 이 충격에 남은 졸음마저 씻은 듯이 달아났다.
"아——!" 그가 신경질적으로 악을 쓰며 침상을 두드렸다.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그렇게 부르짖은 뒤, 그는 양팔을 벌린 채 눈을 감고 침상 머리에 기대어 누군가 와서 제 옷을 입혀주고 머리를 빗겨주길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옷가지가 저절로 몸에 감기지 않았다. 해평이 짜증스럽게 눈을 떠보니 침실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종소리나 하인들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수상쩍은 작은 반우 하나가 방구석에 버섯처럼 쭈그려 앉아 그를 관찰하고 있을 뿐이었다.
해평은 그제야 떠올렸다. 여기는 잠수사이고, 시종이 없다.
어린 반우는 혼도 지혜도 부족한 존재였다. 사람의 말을 아예 못 알아듣는 것은 아니나, 깊이 이해하지도 못했다. 해평이 보기에 지적 수준이 삼형의 그 망할 고양이와 비슷했다.
방전이 헛소리를 한 게 틀림없었다. 옷 시중이나 머리 빗질 같은 섬세한 일은 고사하고 이부자리를 펴고 마당을 쓰는 일조차 기대할 수 없었다.
해평은 당장 녀석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아침잠을 설친 짜증을 담아 꼬마를 서재 쪽으로 내던졌다. "저리 가. 거치적거려."
옷을 입고 세수하는 것까진 어찌저찌 넘겼으나 제 손으로 머리를 빗는 일은 목숨을 반쯤 갉아먹는 고역이었다. 머리카락을 제대로 추스르기도 전에 같은 원을 쓰는 상균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울렸다. "사용! 갔어? 조과에 늦겠다! 서둘러, 빨리빨리빨리!"
수다쟁이 상형이 말을 다 더듬는 걸 보니 몹시 급한 모양이었다. 해평이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해 보니 아직 시간은 제법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상형이 문짝을 긁으며 쳐들어올 기세였기에 해평은 반쯤 쥐어뜯은 머리카락을 억지로 관 안에 쑤셔 넣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카락이 얼마나 뽑혀 나갔는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차라리 출가해서 머리를 밀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간신히 지도 한 장을 챙겨 들기 무섭게 들이닥친 상균에게 팔을 붙잡혀 이끌려 나갔다.
상균이 물었다. "문로부* 챙겼어?"
해평은 어리둥절했다. 그걸 왜?
*문로부(問路符): 길 안내 부적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상균이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괜찮아. 내가 한 묶음 챙겨 왔으니까. 쓰다 망쳐도 여분이 있어. 빨리 도동을 찾자. 부적은 처음 써보는 거라 요령이 없어서 여러 번 시도해야 할텐데……. 어, 저기!"
해평이 그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들어보니 동문 여러 명이 도동 하나를 에워싸고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조과는 건곤탑이야. '건곤탑'은 정자로 반듯하게 써야지…… 앗, 선을 벗어나지 않게 조심하고!"
"다 됐어, 다 됐어! 빨리! 빨리 붙여!"
"다들 도동 앞을 막고 서 있지 마. 길을 막으면 안내를 못 하잖아. 좀 비켜."
상균이 해평의 팔을 잡아끌며 무리 속으로 들어갔다. "잘됐다! 저 사람들이 벌써 안내 도동을 찾아냈어. 얼른 따라가자!"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로부를 뒤통수에 붙인 도동이 스르륵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그 짚인형은 마치 대갓집 규수가 사뿐사뿐 걷는 듯한 종종걸음으로, 혹여나 개미 한 마리라도 밟을세라 단아하게 오솔길을 따라 서쪽을 향해 나아갔다.
이 아가씨의 연꽃 걸음으로 유창하게 걸어가다가는 건곤탑에 도착할 즈음엔 다 같이 모여 섣달그믐날 저녁이나 먹게 생겼다.
"……"
소년 제자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좌절했다. 그제야 해평은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지도를 챙기지 않았으며, 모두의 손에 쥐어진 것이라곤 문로부뿐임을 알아차렸다.
이 도련님들은 참으로 대책이 없었다. 그토록 명확한 지도가 있는데 스스로 보지 않고 어찌 이른바 '선기'를 맹신한단 말인가?
"저런 거에 기대지 마." 해평이 재빠르게 지도를 훑어보며 영녕후의 가법 매질을 피해 금평 전역을 도망치던 길 찾기 감각을 꺼내 들었다. "나를 따라와."
"실례지만 어느 댁 공자이십니까?"
"건곤탑으로 가는 길을 아십니까? 혹시 집안 어르신 중에 잠수사에 몸담고 계신 분이라도 계신지요?"
"혹시 다른 안내용 선기라도 가지고 계신 겁니까?"
해평은 속으로 말했다. '따라오기나 할 것이지. 북쪽도 못 찾으면서 무슨 잔말이 그렇게 많아?'
하지만 아직 입문 첫날이 아닌가. 사고 치지 말라던 후야의 당부가 귓가에 생생하게 맴돌았다. 그는 꾹 참고 상균이 뒤에서 제 이름을 조잘조잘 소개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제자들도 악명 높은 '영녕후 세자'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지 기묘한 침묵이 맴돌더니 저마다 다른 어조로 "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라며 인사를 건네왔다.
어찌 됐든 길 잃은 처지인 이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해평의 뒤에 줄줄이 매달려 건곤탑을 향해 우르르 굴러갔다.
십 년간 적막했던 잠수사에 이런 무리가 들이닥치자 골짜기의 산새들이 놀라 사방으로 흩어지며 분노의 '천분天糞' 몇 무더기를 투하해, 행렬 맨 뒤에서 처져 걷던 허약한 도련님들 몇몇에게 거름을 내렸다.
마침내 건곤탑의 현판을 보았을 때, 상균이갑자기 숨이 넘어갈 듯한 비명을 질렀다. "큰, 큰일이야. 도동이 징을 치려 해!"
잠수사의 일과는 모두 옛 관례를 따랐다. 진시에 종을 울리고, 신시 정각에 북을 치며, 한밤중에는 야경을 돌고, 묘시 초각에는 벼락을 내렸다.* 그리고 묘시 삼 각의 조과처럼 그 외의 중요한 시각은 도동이 징을 쳐서 알렸다.
산골짜기는 소리를 울리게 하니 징 소리 한 번이면 사방에 울려 퍼질 터였다.
*진시(辰時, 오전 7~9시), 신정(申正, 오후 4시경), 야반(夜半, 자정), 묘초(卯初, 새벽 5시경). 야경을 돈다는 것은 야간에 시각을 알리기 위해 징이나 북 등을 치며 순찰하는 것을 뜻한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해평이 한걸음에 다가가 다짜고짜 도동의 손에 들린 징채를 빼앗았다.
도동은 한 무리의 건장한 청년들이 산사태처럼 우르르 쏟아져 들어가는 꼴을 두 눈 뜨고 보면서 망연히 빈손으로 징 표면만 긁어대며 제자리를 돌았다.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건곤탑 안으로 들이닥쳤다. 주관을 맡은 선존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였다. 그제야 해평은 목구멍에 걸렸던 숨을 겨우 내쉬었다.
그는 징채를 품에 쑤셔 넣고 주변을 둘러보며 대충 빈자리를 찾아 앉으려 했다. 그런데 채 앉기도 전에 옆자리의 누군가가 역병이라도 피하듯 벌떡 일어나 자리를 옮기는 것이 아닌가.
해평이 고개를 들어 보니 태자의 처남이었다.
처남의 이름은 요계姚启였다. 일찍 친모를 여의고 적모도 그를 반기지 않았다. 학대까지는 아니었으나 변변한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다. 십여 년 전, 장 황후 일가가 몰락하며 풍광을 누리던 승은후 장씨 가문이 흩어지는 꼴을 본 요 대인은 그야말로 간담이 서늘해졌다.
요 대인은 비록 하찮은 태사령에 불과했으나 지위는 낮아도 위태로움을 멀리 짚어 걱정하는 성품이라 승은후의 잘려 나간 목이 제 집안의 내일이 될까 두려워했다. 큰딸이 동궁에 태자비로 시집간 뒤로 요 대인은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 장씨 일가의 멸문지화 이야기를 꺼내어 복습할 정도였다.
영녕후의 말을 빌리자면, 태자비의 일가는 하나같이 신경질적이고 과민한 작자들이었다.
요계는 그 과민한 요씨 집안에서 자라며 늘 주눅 들어 몸집마저 어린 소녀처럼 작았다. 뜻밖에 잠수사에 선발된 것만으로도 기절할 노릇인데, 하필 해씨 가문의 자제와 같은 원에 배정되었다는 소식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태자는 훗날을 기약하는 저군储君이요, 장왕은 선천적으로 병약했다. 두 사람 모두 선발에 참가하지 않았으니 태명 황제의 슬하에 속세에 남은 성년 황자는 오직 이 둘뿐이었다. 한 명은 명실상부한 적장자이나 생모에게 연루되었고, 다른 한 명은 처세가 원만하여 성은을 한 몸에 받는 귀비의 아들이었다. 설령 두 사람에게 권력을 다투려는 마음이 없다 해도 주위 사람들이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태자비의 친정과 해 귀비의 친정 사이에 불화가 없는 까닭은 양쪽 모두 꽤나 무력하여 내세울 '세력'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지…… 결코 사이가 좋다는 뜻이 아니었다.
요계는 전날 밤 반수면 상태로 뜬눈을 지새우며 해평이라는 혼세마왕이 자신을 어떻게 괴롭힐지 상상하느라 하마터면 측간에서 밤을 샐 뻔했다. 이른 아침부터 허기진 간담을 부여잡고 건곤탑에 겨우 기어왔는데 그 흩어지지 않는 악령이 또다시 제 쪽으로 떠밀려 오자 반응이 클 수밖에 없었다.
너무 허약해진 탓인지 그가 엉성하게 일어나는 바람에 '쿵' 소리와 함께 단단한 나무 의자가 나뒹굴었고, 모두의 눈길이 쏠렸다. 제자들의 수군거림이 일순간 잦아들며 여러 시선이 요계와 해평의 얼굴에 머물렀다.
요계는 시선이 집중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얼굴이 붉어졌으나 해평은 남의 시선을 즐기는 위인이었다.
해씨 가문의 한량 도련님은 개의치 않고 웃음을 터뜨리며 껄렁한 투로 농담을 던졌다. "늦었어 자명형. 어젯밤 나랑 한 처소에서 하룻밤을 보냈으니 순결은 이미 없는 거야."
이 호랑이 같은 말을 듣고는 제자들 사이에서 한꺼번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요공자는 세상에 이렇게 낯가죽이 두꺼운 자가 있다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이 떡 벌어져 수치와 분노로 죽고 싶어졌다.
"됐다, 됐어." 그때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수려한 청년이 나서서 분위기를 수습하며 해평을 끌어당겼다. "자명은 아직 나이가 어리잖아. 사용, 그만 놀려. 이리 와서 내 옆에 앉아. 우리도 몇 년 만이지, 어릴 때 같이 놀기도 했는데 말이야."
그 청년은 이십 대 초반에 눈매가 깨끗하고 이목이 수려했다. 장왕과 윤곽이 조금 닮아 있었으니, 다름 아닌 임 숙비 소생의 사황자 주서였다.
사전하의 체면을 무시할 순 없었기에 해평은 순순히 그를 따라 앉았다. 입을 열어 인사하려는 찰나 뒷문 쪽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꽤 떠들썩하구나."
그것은…… 아직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아이의 젖내 나는 목소리였으나, 억지로 세월의 풍파를 겪은 듯 길게 빼며 노인 특유의 떨림까지 섞어 낸 탓에 유독 귀에 거슬렸다. 일찍 거세당한 늙은 환관 같았다.
건곤탑 전체가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웃음을 터뜨리던 이들은 황급히 이를 감추며 입을 다물었다. 주서가 해평의 옷자락을 꾹 잡아당겼다.
"쳐다보지 마라." 주서가 작은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나선존께서는 남이 직시하는 걸 싫어하셔."
해평은 영문을 몰랐다. 이 '나선존'이라는 분이 무슨 예가 아닌 것은 보지 마라의 규중처녀란 말인가?
그는 충고를 받아들여 고개를 들지 않고 참았다. 잠시 후 곁에서 부스럭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건곤탑 한가운데에는 사오십 단에 달하는 돌계단이 있었고, 그 꼭대기의 높은 단상에 오르면 모든 제자의 정수리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해평은 시야 구석으로 천청색의 넓은 소매가 곁을 지나쳐 가는 것을 보았다. 소맷부리가 거의 바닥에 끌릴 듯 길었다.
이 나선존은 수수*를 방불케 하는 연극 의상을 펄럭이며 휘두르며 느릿느릿 단상에 오르더니 또다시 가성을 짜내어 호통을 쳤다. "어느 놈이 도동의 징채를 훔쳐 갔느냐? 당장 내놓거라!"
*수수(水袖): 중국 전통 희곡에서 배우가 착용하는 길게 늘어진 소매.
해평의 엉덩이는 흔들림 없이 의자에 굳게 붙어 있었다. 그가 속으로 생각했다. '헤헤, 맞혀 봐.'
생각이 막 떠오르는 순간 그의 갈비뼈를 단단한 무언가가 무겁게 가격했다. 품속에 감춰두었던 징채가 저절로 옷섶을 찢으며 허공으로 날아가 하마터면 해평의 턱을 칠 뻔했다.
해평이 징채를 피하려 반사적으로 고개를 젖힌 순간, 돌계단 위의 나선존을 보게 되었다. ……선존은 고작 열한두 살쯤 되어 보이는 동자였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양옆에서 부채질을 하는 도동들과 키가 같았다!
어쩐지 소매가 땅에 끌리더라니.
손을 올려 징채를 받아 든 나선존의 차가운 시선이 해평의 얼굴에 떨어졌다. "너. 네놈 이름이 무엇이냐?"
곁에 앉은 사전하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리며 차마 볼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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