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평은 잠시 저울질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선존이라 해도 고작 징채 하나 때문에 자신을 내쫓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당당하게 이름을 밝히고는 마지막으로 두 손을 모아 읍하며 시원하게 잘못을 인정했다. "선존, 제가 잘못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금평에만 갇혀 지내다 보니 이렇게 독특한 징은 본 적이 없었고, 문규에도 도동의 징채를 가져가면 안 된다는 말은 없기에 그저 빌려서 견문을 넓히려 했을 뿐입니다. 선존께서도 늦잠을 주무셔서 조과에 지각하실 뻔한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
늦잠은 네놈이 잔 거겠지!
주서는 이가 다 시큰거렸다. 그가 이 영녕후 세자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10년 전 셋째 형 곁에서였는데, 콩알만 하던 시절부터 이미 만만한 놈이 아니어서 하루에 태부를 두 번이나 기절시킬 뻔한 전적이 있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러 악연이 도져 다시 동창이 되다니, 꼭 어서재*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어서재(御書房): 궁궐 안의 서재. 황자와 귀족 자제들이 함께 글을 배우던 곳
"해사용." 나 선존이 앳된 목소리를 길게 끌며 해평의 이름을 매섭게 씹어 뱉었다. "재미있군."
그러고는 '수수'를 휙 휘두르며 더 이상 해평을 상대하지 않고 높은 곳에서 뭇 제자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본인은 나청석, 잠수사에서 150년째 수행 중이며 너희는 내 손에 맡겨진 열다섯 번째 범인 제자들이다. 너희 중 적잖은 폐물들이 조상의 음덕에 기대어 섞여 들어왔음은 스스로도 잘 알 터. 미리 험한 말을 해두마. 수행의 길은 오로지 자신에게 달렸으니 잠수사에 들어왔다고 해서 반드시 영규가 열리라는 법은 없다."
집안에 연줄이 좀 있는 제자들은 잠수사의 '난쟁이 나찰'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된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기에 건곤탑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아무도 그의 눈에 띄어 모난 돌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첫 조과이니 얼굴이나 익혀두마." 나청석이 눈꺼풀을 내리깔고 제자들을 한 바퀴 쭉 훑어보더니 해평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너부터 시작하지. 해 사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해평은 보이지 않는 손이 옷깃을 움켜쥐고 앞으로 거칠게 끌어당기는 것을 느꼈다. 골반뼈가 책상 모서리에 부딪힐 뻔했다. 해평이 제때 엉덩이를 틀어 가까스로 석탁 모서리를 피하자마자, 욕을 내뱉을 겨를도 없이 돌계단 아래 작은 평대 위로 끌려 나왔다.
이내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한 사람만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 안에 갇혔다.
나청석과 동창들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희미해졌다.
해평은 안락향에서 지 장군에게 개자 안으로 끌려간 적이 있었다. 한 번 겪어본 일이라 자신이 또다시 개자 안으로 끌려왔음을 바로 알아차렸다. '개자는 주인을 닮는 법이군.' 나거선巨仙의 개자는 남들 것보다 참으로 널찍했다!
나청석이 입을 열었다. "이건 '영감개자靈感芥子'라 부른다. 너희가 타고난 영민함과 둔함을 측정할 수 있지. 이른바 '영감'이란 너희 미간에 있는 제3의 눈으로, 영기와 탁기를 분별하고 사물을 관찰하며 기운을 감식하는 능력을 말한다. 오늘 제위들과 처음 만나는 자리이니 이것으로 밑바탕을 파악해 앞으로 1년간 각자의 자질에 맞춰 가르치겠다."
"개자 안에는 여섯 개의 갈림길이 있다. 첫 번째 갈림길에선 둘 중 하나, 두 번째는 넷 중 하나를 고르며, 이런 식으로 나아가 마지막 갈림길에는 예순네 갈래의 길이 있다. 그중 오직 단 한 길만이 밖으로 이어지는데, 바로 영기가 가장 짙은 길이다. 길을 잘못 들면 영기가 점차 옅어지고 끝에 다다르면 막다른 길이니 되돌아와 다시 골라야 한다. 또한 몇몇 잘못된 길은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 안에는 탁기가 자욱하여 무엇을 마주칠지 알 수 없으니 조심하거라. 영감도 둔하고 운까지 나쁜 자는……." 나청석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냉소를 흘렸다. "그저 제 목숨이 질기기를 바라야겠지. 향 하나가 다 타기 전에 빠져나오지 못하는 자는 모두 타고난 영감이 둔한 자들이니 매일 조과에 남들보다 한 시진 일찍 나와야 한다."
"……"
안 그래도 이른 묘시 삼각에서 한 시진을 더 일찍 오라니. 새벽 닭 울음소리라도 시키겠다는 건가?
나청석이 "도동은 향에 불을……" 하고 명을 내리려는데, 돌연 사전하가 낭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자 주서, 불분명한 점이 있어 사형께 가르침을 청하고자 합니다."
나청석은 눈꺼풀을 들어 그를 흘끗 보더니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아, 사황자…… 전하, 무슨 하명하실 말씀이라도?"
"당치 않습니다." 주서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굽힘 없이 말했다. "선존께 여쭙고 싶습니다. 방금 전 여러 차례 '영기'와 '탁기'를 언급하시며 이 개자는 오직 '영기가 가장 짙은' 길을 찾아야만 빠져나올 수 있다 하셨습니다. 허나 선존께서는 아직 저희에게 무엇이 '영기'이고 무엇이 '탁기'인지 가르쳐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청석이 젖내를 풍기며 짐짓 어른스레 말을 잘랐다. "어린아이는 말을 할 줄 몰라 무엇이 '단맛'이고 '쓴맛'인지 모르지만, 사탕을 먹으면 웃고 약을 핥으면 운다. 제위들은 모두 이름과 자가 있고 신분을 갖춘 자들인데, 설마 내가 옷 입고 밥 먹는 법부터 가르쳐야 하는 것이냐?"
주서는 신분이 고귀하여 잠수사의 관리직 반선조차 그를 보면 깍듯이 대했고 같은 기수 제자들도 그에게 세 푼쯤 양보하곤 했다. 이렇게 대놓고 면박을 당한 적은 없었다. 그의 안색이 절로 가라앉았다.
나청석이 외쳤다. "향을 피워라!"
해평은 바깥사람들이 말하는 소리는 들을 수 있었으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반면 건곤탑 안의 다른 제자들이 보기에 해평은 투명한 유리 구슬 안에 갇힌 것처럼 두 발이 지면에서 석 자쯤 떨어진 채 허공에 떠 있는 형상이었다.
개자 안에서는 하늘과 땅, 심연과 산봉우리가 모두 접혀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는 해평이 다리를 뻗어 제법 큰 보폭으로 앞으로 걸어가는 듯 보였으나, 정작 몸은 허공 제자리에 둥둥 뜬 채 미동도 없었고 오직 개자 안의 길만이 계속해서 바뀌고 있었다. 이내 그는 첫 번째 갈림길에 다다랐다.
영기니 탁기니 하는 소리는 전혀 사람의 말처럼 들리지 않았고, 어차피 해평은 단 한 글자도 이해하지 못했다.
쓸데없이 골머리를 앓아봐야 답이 나올 리 만무하니 차라리 뇌를 괴롭히지 말고 무작정 찍어보는 편이 나았다. 틀리면 돌아오면 그만이니까.
그리하여 나선존이 이二 리나 되게 길게 뺀 '향' 자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해평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왼쪽 길을 택했다.
다른 제자들은 그의 그토록 자신만만한 모습에 으레 정답을 맞혔거니 여겼으나 오직 주서만이 나청석이 짓궂게 웃는 것을 흘끗 보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해사용이 분명 틀린 길을 골랐군.'
난쟁이 나찰은 소심하고 앙심이 깊기로 유명했다. 영감개자는 온전히 그의 통제하에 있었다. 만약 그가 작정하고 사람을 골탕 먹이려 든다면 첫 번째 오답 길은 이른바 '탁기가 자욱한' 험난한 길일 터였다.
주서는 잠시 머뭇거리다 장왕을 떠올렸다. 사실 그는 셋째 형님의 손길이 잠수사까지 뻗쳐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자신과 영녕후 세자는 겉보기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좋았기에, 소리 내어 해평에게 경고하려 했다.
그러나 개자 안의 변고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찾아왔다. 주서가 미처 뭐라 말할지 궁리하기도 전에 해평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 것이 보였다. 거의 동시에 투명하던 개자가 아무런 전조도 없이 시꺼멓게 변하더니 그 안의 해평을 칠흑 같은 어둠이 집어삼켜 버렸다!
뒤이어 그 어둠 속에서 귀를 찢는 포효가 터져 나왔다. 앞줄에 앉아 있던 제자들은 무방비 상태에서 소스라치게 놀라 뒷사람의 탁자를 엎어버릴 뻔했다.
개자 안의 해평은 소름 끼치는 한기가 얼굴을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짙은 피비린내가 바닥에서부터 치솟아 올랐다. 어둠 속에서 돌연 어금니를 드러낸 서슬퍼런 머리통이 불쑥 튀어나왔다. 수박만 한 크기에 피투성이의 커다란 입을 쩍 벌리고 귀신처럼 울부짖으며 정면으로 돌진해 왔다. 단숨에 그의 머리를 물어뜯을 기세였다!
좁은 길 위에서 좌우로 피할 곳이 전혀 없었다!
나청석의 얼굴에 번진 웃음기가 한결 짙어졌다. "내 분명 조심하라고 일렀거늘, 어떤 이들은……."
다음 순간, 그의 말은 또 다른 포효에 의해 끊기고 말았다.
해평은 본디 성격이 사납고 제멋대로라 기분이 좋고 상대가 마음에 들 때나 가끔 물러서 주지, 좁은 길에서 마주쳤을 땐 결코 길을 양보하는 법이 없었다.
여섯 살 때도 길에서 사나운 개를 마주치면 몽둥이를 들고 덤비던 녀석이다. 하물며 지금은 어엿한 장정만큼 키가 훌쩍 자라지 않았던가.
피할 곳이 없음을 확인한 해평은 아예 앞으로 한 발짝 억세게 밀고 나가 팔을 길게 뻗어 흉악무도한 머리통을 막아섰다. 온몸이 강한 충돌에 밀려 열 걸음 넘게 뒤로 밀려났다.
머리통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그를 물려 했지만, 해평이 이를 용납할 리 만무했다. 그래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양쪽 뺨의 울퉁불퉁한 살덩어리를 움켜잡았다!
이 머리통은 살갗에 종기가 가득하고 피와 살이 엉겨 붙어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게 생겨먹었는데, 난생처음 누군가에게 얼굴을 꼬집히며 희롱을 당하자 어안이 벙벙해져 잠시 굳어버리더니 이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이 대망나니를 향해 맹렬한 포효를 내질렀다.
그 울부짖음은 사람의 뇌수를 헤집어 놓는 듯했다. 정면으로 포효를 맞은 해평은 그 소리에 밀려 한순간 어지럼증을 느꼈다. 귀를 막을 손이 없던 해평은 입을 크게 벌려 귀청이 떨어질 듯한 고함을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가슴속은 여전히 답답하고 꽉 막혀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아예 목청을 돋워 고스란히 갚아주기로 했다. 토하는 것보단 소리를 지르는 게 낫지 않은가.
이 두 분은 개자 안에서 머리를 맞대고 무려 반 각 동안이나 울부짖었다. 어찌나 단전의 기운이 옹골찬지 그 요란한 소리에 건곤탑 전체가 진동했다. 제자들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길이 없어 아연실색한 채 입만 벌렸다.
참다못한 나청석이 호통을 쳤다. "전부 입 닥쳐라!"
개자 안의 머리통은 그 소리에 응답하듯 한 줄기 푸른 연기로 화하더니 이내 감쪽같이 사라졌다.
해평은 관성에 휩쓸려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입안이 바싹 마른 채 헛기침을 두 번 하고 보니 이미 첫 갈림길로 되돌아와 있었다.
개자가 다시 투명해지며 해평이 제자들의 시야에 돌아왔다.
나청석은 향안을 힐끗 보더니 이 녀석이 절대 개자를 빠져나오지 못하리란 걸 확신했다.
옆에 앉아 눈을 감고 기력을 다스리던 그가 긴 소리를 끌어 '노래하듯' 말했다. "향 하나가 이미 반이나 탔건만, 해 사제는 아직 첫 번째 갈림길도 통과하지 못했군……."
개자 안의 해평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재빨리 오른쪽 갈림길로 몸을 돌렸다.
다리가 길어 걸음이 빠른 탓에 오래지 않아 두 번째 갈림길이 나타났다.
해평은 멈춰 서서 생각에 잠긴 듯 제 발밑을 의미심장하게 내려다보았다. 남다른 청력 덕에 그는 각기 다른 길에서 들리는 제 발소리의 음색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잘못된 길을 걸을 때는 발소리가 다소 묵직하고 울림이 있는 반면, 오른쪽의 올바른 길은 발소리가 확연히 '깨끗'했다.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해평은 다시 한번 시험해 보기로 했다. 그는 눈을 감고 네 갈래 길의 입구에서 재빨리 한 번씩 발을 굴렀다. 과연, 네 길의 발소리에는 미묘하게 무겁고 가벼운 차이가 있었다.
해평은 발소리가 가장 가벼운 길을 택해 뛰어 들어갔다. 이후의 모든 갈림길도 같은 방식을 썼다. 나청석의 말마따나 잘못된 길은 영기가 갈수록 옅어지고 바른 길은 영기가 짙어져 뒤로 갈수록 발소리의 경중을 분별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제자들은 그가 정답과 오답이 반반일 때조차 가장 위험한 곳을 고르더니 초입부터 처절하게 절반 이상의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보고, 뒤로 갈수록 더욱 조마조마한 상황이 벌어질 거라 짐작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도 그는 고삐 풀린 당나귀 마냥 단숨에 끝까지 내달렸다.
마치 처음에 길을 잘못 든 것은 일부러 보는 이들을 가지고 놀기 위함이었던 것처럼!
그러나 해평이 죽은 목숨이라 확신한 나청석은 아예 눈조차 뜨지 않았다. 그의 말씨가 워낙 느릿느릿하여 앞선 문장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해평은 이미 마지막 갈림길을 통과한 뒤였다.
전혀 눈치채지 못한 나청석은 홀로 독백을 이어갔다. "……아무래도 내일 인시 삼각에 건곤탑에 와서 징을 치고 싶은 모양이로군."
말을 맺기가 무섭게 높은 단상 아래서 누군가 말을 받았다. "아. 저 나왔는데, 그래도 가야 합니까?"
꼬리라도 밟힌 듯 펄쩍 뛰어오른 나청석의 눈앞에 머리카락 한 올 상하지 않은 해평이 개자 밖에 서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해평은 평소에도 몸을 움직이길 좋아했던지라 금방 숨 막히는 경주를 마치고 나왔음에도 잠시 서 있으니 곧바로 숨이 고르게 돌아왔다. 이른 아침에 제대로 묶지 못해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가닥을 아무렇지 않게 뒤로 쓸어 넘기는 모습은 추레해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특유의 방탕하고 얽매임 없는 풍류를 자아냈다.
나청석의 동그란 두 눈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당장이라도 벼락을 불러 해평을 선산 무덤으로 보내버리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이때 주서가 다시금 적절히 끼어들었다. "사형, 이번 기수 제자들은 예년보다 인원이 많아 한 사람씩 영감을 시험하려면 서두르셔야 할 듯합니다."
나청석은 입꼬리를 일자로 다물며 간신히 화를 억눌렀다. 소매를 휘둘러 해평을 제자리로 돌려보내고는 이를 갈며 말했다. "좋다, 좋아, 해사용. 제법 재미있군. 스스로도 꽤 대단하다고 여길 만해."
말을 마친 그는 원한에 찬 얼굴로 도동을 가리켰다. "영감 갑등. 기록해라. 다음."
구경하던 제자들이 다시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분위기가 숙연하여 마치 효자현손들이 조상을 애도하는 것 같았다.
나청석이 손을 뻗자 곁에 있던 도동이 부스럭거리며 돌아서서 제자 명부를 건넸다. 해평의 이름이 마침 맨 끝에 있었기에 나청석은 아예 역순으로 호명했다. "요계, 요자명."
주서는 요계가 벌벌 떨며 단상으로 오르는 틈을 타 해평에게 낮게 속삭였다. "나선존은 이미 축기 중기에 다다른 분이라 천기각 도통조차 그를 뵈면 선배로 예우해야 해. 사용, 비록 그분이 우리처럼 영규도 열리지 않은 범인들과 진지하게 따지지는 않으시겠지만, 너도 타고난 자질만 믿고 그분을 놀려서는 안 된다."
앞의 몇 마디는 귀담아들었으나 마지막 말은 사전하가 대체 어디서부터 오해한 건지 알 수 없어 해평은 의아하게 물었다. "제가 언제 놀렸다고 그러십니까?"
주서는 '스스로 알면 그만이지'라는 식의 눈빛만 던질 뿐 더 이상 그와 말을 섞지 않았다.
방금 전 나청석이 '갑등 영감'을 선언했을 때부터 주서가 해평을 보는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타고난 '갑등 영감'은 만 명 중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재목으로, 이른바 전설 속의 '눈 감고 돈을 걸어도 도박판을 쓸어 담는' 자들이었다. 직감으로만 따지자면 웬만한 평범한 반선보다 더 정확할지도 몰랐다.
그런 자가 첫 번째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그해서 주서는 결론을 내렸다. 해사용은 분명 일부러 그런 것이다.
일찍이 영녕후 가문의 안하무인 성정을 들어 알고 있던 주서는 해평의 저 '순진한 척'하는 얼굴을 흘겨보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느꼈다. 실물이 소문보다 훨씬 안하무인했다.
그사이 요계는 이미 영감 개자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밤새 설사를 한 탓인지 요 공자의 다리가 하도 떨려 도포 밖으로 그 진동이 다 보일 지경이었다. 걷는 내내 노심초사 허리를 굽힌 모습이 아예 배를 땅에 붙이고 기어가지 못하는 게 한스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매번 갈림길에 다다를 때마다 요계는 눈을 한참 동안 무언가를 중얼거리다 결단을 내리곤 했는데, 주문을 외우는 건지 조상님들의 가호를 비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토록 노력했음에도 그의 운은 실로 볼품없었다.
겨우 갈림길 두 개를 넘었을 때, 개자 안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또다시 사방이 어두워졌다.
해평이 악의에 의해 표적이 된 것이라면 요계는 순전히 본인 스스로 재수가 없었다. 나청석도 그가 이렇게 처음부터 액운을 맞닥뜨리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요계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뒤돌아 달렸으나 이미 때가 늦어 있었다.
이내 그도 시커먼 탁기에 집어삼켜졌다. 해평이 장난치듯 부르던 이중창에 비하면 이번에 들려온 동정은 몹시 처절했다. 어둠 속에서 먼저 불길하게 옷감이 찢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뒤이어 음이 뒤틀린 비명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무언가가 살갗을 베어내는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앞줄의 제자들은 더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앞다퉈 자리를 뒤로 물렸다.
향 한 대가 모조리 다 타들어가서야 칠흑 같은 개자는 사람을 내뱉어 냈다.
검은 기운이 흩어지며 요 소공자가 땅에 쓰러졌다. 그의 등은 맹수에게 뜯어 먹힌 듯 찢겨 있었고, 몇 줄기 발톱 자국에 살점이 죄다 뒤집혀 있었다.
숨이 간당간당해진 채 바닥에 엎드린 요계의 얼굴은 누렇게 떴고, 누가 봐도 곧 숨이 넘어갈 몰골이었다.
건곤탑 안을 맴돌던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멎었다.
나청석이 코를 막으며 질색하듯 손을 내저었다. 도동 두 명이 일정한 속도로 다가와 요계를 들어 올린 뒤 그의 입에 단약 한 알을 넣었다. 단약은 과연 선가의 물건이었다. 입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등에 난 상처가 빠르게 아물며 얼굴에도 금세 혈색이 돌았다. 그가 돌의자에 뉘어질 즈음엔 이미 어렴풋이 의식을 차려 앉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눈을 뜨자마자 나청석의 서늘한 선고가 떨어졌다. "내일 조과에 한 시진 일찍 건곤탑으로 오거라. 다음."
청천벽력 같은 비보에 요 소공자는 두 눈을 까뒤집고 또다시 혼절하고 말았다.
순간, 해평은 사방팔방에서 쏟아지는 구조 요청의 시선에 포위되었다. 한동안 고개를 어디로 돌려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는 할 수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소곤거렸다. "잘못된 길에서는 발소리가 좀 더 무겁고 울림이 있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던 제자들이 서둘러 이를 마음속에 새기려는데, 주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남의 말을 함부로 믿지 마라. 사람마다 영감의 예리함과 둔함이 다를진대, 타인의 경험을 맹신하다간 도리어 곁길로 빠지기 십상이다. 정 어찌할 바를 모르겠거든 개자에 들어선 후 잡념을 비우고 눈을 감은 채 앞을 향해 나아가 보거라. 우리 같은 범인 제자들의 영감을 측정하는 관문이 그리 까다로울 리 없으니 당황하지만 않는다면 모두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을 거다."
해평은 그의 말이 꽤 일리가 있다고 여겨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네, 맞아요."
주서는 속내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를 한 번 바라보았다. 사람의 '영감'이 '제3의 눈'이라 불리는 까닭은 그것이 혼돈의 속성을 띠며 오관육감의 위에 군림하기 때문이다.
영규가 트인 반선만이 영감을 구체적인 시청각과 촉각, 미각에 실어 쓸 수 있으며 이를 일컬어 '통령通靈'이라 한다.
이미 통령의 경지에 올랐다면 애당초 이곳에 올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 해사용이란 놈은 사형과 선배에게 불경하게 굴며 잔꾀를 부리는 데다, 동창에겐 터무니없는 허풍을 떨며 고의로 오도하려 드니 참으로 몹쓸 인간이었다.
과연 주서의 말대로 나청석은 얼굴이 사나울 뿐 제자들을 일부러 곤경에 빠뜨리지는 않았다. 개자 안의 영기와 탁기의 구분이 모호하여 가려내기 어려울 땐 갈림길의 수도 적어 찍기 수월했다. 뒤로 갈수록 갈림길은 늘어났으나 영기 역시 점차 짙어졌기에 제자들이 마음만 잘 다스린다면 열에 예닐곱은 향이 다 타기 전에 눈치껏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악의적으로 표적이 된 해평과 각별히 '운'이 좋았던 요계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개자가 어두워지는 상황을 겪은 이는 없었고, 대부분의 잘못된 길 또한 끝에 가선 그저 막다른 골목일 뿐이라 되돌아 나오면 그만이었다.
그중에서도 임씨 직계 자제 임침풍과 사전하 주서가 가장 안정적이었다.
주서는 여섯 살 때부터 눈을 가리고 영석의 등급을 매길 줄 알았다. 그는 당당히 개자 안으로 걸어 들어가 눈을 감고 모든 갈림길에서 손을 뻗어 잠시 기운을 감지하더니 몇 호흡만에 길을 골라냈다. 단 한 번의 헛걸음 없이 여섯 개의 갈림길을 단번에 통과한 그는 일 각도 안 되어 무사히 빠져나와 제자들의 경탄 속에서 여유롭게 나청석에게 예를 올렸다.
나청석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손만 휘저었다. "음, 내려가라."
주서는 개의치 않고 기품 있는 미소를 걸친 채 자리로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그가 앉기도 전에 나청석이 옆의 도동에게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을등 영감."
주서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나청석이 이어서 말했다. "모두 끝났다. 불합격한 자는……"
주서가 입을 열었다. "사형께 여쭙겠습니다. 영감에 등급을 매기시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제자가 그 격차를 알아야 훗날 근면함으로 부족함을 메울 수 있을 듯합니다."
"내가 측정하는 건 선천적인 영감이다. 너희가 어려서부터 영석을 주무르며 훈련한 건 쳐주지 않는다." 나청석이 귀찮다는 투로 말했다. "그래도 근면함으로 부족함을 메운다는 이치를 알고 있다니 참으로 좋구나. 계속 유지하거라."
칭찬인 듯했지만 주서는 형언할 수 없는 거북함을 느꼈다.
나청석은 그가 덜 거북해할까 염려라도 하듯, 말을 잇다 말고 악의적인 눈빛으로 해평을 힐끗 보았다. "한 십 년, 팔 년쯤 열심히 하면 타고난 격차도 얼추 메워질 게다."
해평은 말문이 막혔다. "……"
이 사람은 백주대낮에 대체 무슨 심보로 이간질을 하는 걸까?
"말하는 것을 잊었구나. 잠수사에는 너희 몫으로 배당되는 영석이 있다. 매달 남옥 세 개. 훗날 영규를 트든 선기를 부리든 전부 영석을 써야 한다. 잠수사의 모든 관리 반선과 우리 같이 도를 가르치는 모든 이들은 제위들의 영석 배당량에 상벌을 내릴 권한을 지닌다." 나청석은 제자 명부를 탁 덮었다. "조과에 한 번 지각할 때마다 한 알씩 차감. 방금 영감 시험에 불합격한 자는 내일 인시 삼각에 보자꾸나. 늦지 말거라."
말을 마친 천청색 그림자가 한 번 번쩍이는가 싶더니 목소리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이미 건곤탑 문 앞을 지나 유유히 사라진 뒤였다.
해평이 주서에게 말을 건네려 했으나 사전하는 어느새 몸을 돌려 요계에게 안부를 묻고 있었다. 지척에 있으면서도 갑자기 귀라도 먹은 듯 해평이 부르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
해평은 굳이 차가운 엉덩이에 뜨거운 낯짝을 들이밀지 않았다. 사전하의 느닷없는 소원함을 감지한 그는 이유를 묻지 않고 깔끔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인색한 잠수사 같으니라고. 한 달에 고작 남옥 세 개를 주면서 이것저것 구실을 붙여 깎아내려 든다.
"별것도 아닌 걸." 해평은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이 도련님한텐 차고 넘치거든."
백옥지척은 평균 칠팔 일에 남옥 한 알을 태웠다. 영기가 고갈된 남옥은 탁한 잿빛 토석으로 변했다. 해평은 처음 스스로 영석을 교체할 때 요령이 없어 반나절이나 끙끙댄 끝에야 겨우 해낼 수 있었다.
영석을 교체한 뒤 해평은 긴 숨을 내쉬고는 상자에서 아무거나 한 알을 집어 반우에게 던져주었다.
순룡쇄는 '신식'으로 다뤄야 한다 들었지만, 해평은 아직 그 신식이란 걸 다루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저 피 한 방울을 떨어뜨려 대략 서나흘 정도 감응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처음 우연히 묻은 피를 제외하면 해평은 순룡쇄를 다시 써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줄곧 '감시'와 '통제'는 양방향이라 여겼다. 남을 '채워' 두면 본인이라고 자유로울 리 있겠는가? 쓸데없는 짓거리였다.
그저 반우가 자신을 물지만 않는다면 해평은 그 꼬마가 어딜 가서 무얼 하든 관심이 없었다. 그 꼬마 괴물이 그저 잔권에 쓰인 대로 무럭무럭 자라, 하루빨리 사람 말을 알아듣고 도련님 대신 일을 거들어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전에 순룡쇄에 감응이 남아있을 때조차 해평은 그 꼬마 괴물이 영석을 먹은 후 '배부르다', '배고프다'를 구분하지 못했으니 감응마저 사라진 지금은 도대체 얼마나 먹여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지척의 영석이 다 타들어 갈 때쯤이면 비단잉어의 색깔이 변하듯, 이 꼬마 괴물도 배가 고프면 자연히 표현할 터였다. 잠자코 있다는 건 괜찮다는 뜻이겠거니 했다.
해평은 영석 상자를 닫고서 장 안에 대충 쑤셔 넣은 뒤 조과를 하러 나갔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들의 시중을 받고 자란 탓에 문을 잠그는 습관이 없었다.
그날 저녁, 방문을 열어젖히자마자 발에 무언가 걸리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숙여 보니 웬 빈 나무상자가 뒹굴고 있었다…… 참으로 눈에 익은 물건이었다.
잠깐!
해평의 가슴에 순간 불길한 예감이 치밀었다. 두세 걸음을 한 걸음에 뛰어 방 안으로 달려들었고, 바닥에 널브러진 채 배가 반 자 넘게 불룩 솟아올라 인사불성이 된 반우의 모습을 목격했다. 온몸에서 푸른 빛이 은은히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옆으론 장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가득 차 있던 영석 한 상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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