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유성이 떨어져 내릴 때, 아향阿响은 화방 나루터로 달려가다 마침 얼음 수레 한 대와 스쳐 지나갔다.
이마를 뒤덮었던 뜨거운 땀방울이 서늘한 기운에 절반 넘게 씻겨 내려갔고, 그녀는 무겁게 짓눌려 있던 울화를 한숨에 토해냈다.
아향은 올해 세는 나이로 열다섯 살이었고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떴다. 예전엔 집에 척박한 논밭이 몇 묘 있었으나 농사지을 일손이 턱없이 부족했다. 늙고 병든 할아버지와 젊은 과부가 아이 하나를 데리고 일 년 내내 뼈 빠지게 일해봤자 곡식 몇 줌 거두기도 버거웠고, 그렇다고 사람을 고용하자니 타산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땅을 사서 공장을 짓겠다는 사람이 찾아오자 할아버지는 땅을 팔아버렸다.
처음 몇 년은 형편이 나쁘지 않았다.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 땅을 파먹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돈벌이가 빨랐기 때문이다. 다만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재작년에 공장에서 돌연 쉰 살이 넘은 자는 쓰지 않겠다고 통보하는 바람에 온 가족이 순식간에 생계를 잃고 말았다.
그해 땅을 팔아 쥐었던 돈마저 갈수록 헤프게 축나더니, 결국 아향의 어머니가 한바탕 병을 앓자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돈은 떨어졌고 사람마저 떠나버려 남은 거라곤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조손뿐이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아향은 할아버지를 따라 짐꾼, 심부름꾼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치웠다. 때마침 대선년을 맞아 일자리를 찾으러 금평으로 올라온 조손은 남교의 공장 지대에서 잡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아향은 요 근래 작은 돈을 벌었다.
처음에는 그저 남성문 밖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듣자 하니 등운교 철로를 깔 때 집안의 땅을 탐관오리들에게 빼앗겼으나 하소연할 길이 없어 상경하여 억울함을 따져 묻는 중이라 했다. 그 후 어찌 된 영문인지 누구도 그들을 거들떠보지 않아서인지 몰라도, 아무튼 그들은 기세를 불리기 위해 돈을 주고 함께 호소해 줄 사람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일은 간단했다. 상소문 한 장을 받아 들고 길가에 대기하다가 크고 화려한 마차가 지나가면 상소문을 번쩍 치켜들고 무리를 따라 함께 구호를 외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하루를 꼬박 채우면 오십 전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부두에서 힘이 가장 장사고 일솜씨가 제일 좋은 짐꾼이라도 하루 품삯이 고작 삼십 전 남짓할 뿐이었으니 수지맞는 장사였다.
할아버지는 그녀가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늙은이답게 어딘가 미신에 푹 빠진 구석이 있어, 그는 "억울한 일도 없으면서 거짓으로 억울타 소리치면 복이 깎이는 법"이라며 역정을 냈다. 하지만 아향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시골에선 돈을 주고 '효자현손'들을 사들여 대신 곡을 하게 만드는 판국에, 그깟 재수 없는 일 한 번 한 게 대수인가. 남의 억울함을 대신 외쳐주는 게 어때서?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할아버지는 짝수 날에 '금반채'를 사면 벼락부자가 될 거라 굳게 믿으며 등잔기름값까지 털어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들을 사 모았으나, 동전 한 푼 당첨된 적이 없었다.
올해 금평은 더위가 일찍 왔다. 아직 단오도 되기 전이건만 벌써부터 더운 기운이 지면을 덮쳤다. 아향의 할아버지는 그 열기에 쪄지듯 병이 나 이틀 내내 밥 한 술 뜨지 못했으면서도 배만은 임신한 아낙처럼 불룩하게 부풀어 올랐다. 아향은 사흘간 남의 억울함을 대신 울부짖어준 대가로 백오십 전을 받아 들었다. 불현듯 예전에 할아버지가 성안에서 일할 때 주인집에서 내어준 밥에 있던 서봉각의 오리 머리가 평생 먹어본 것 중 제일 가는 진미였다고 회상하던 것이 떠올라, 그 돈을 고이 품에 안고 서봉각을 찾아갔다.
그런데 누가 알았겠는가. 할아버지가 '평생 먹어본 것 중 으뜸'이라 꼽았던 것이 남들은 따로 팔지도 않는 내장 부스러기일 줄이야?
아향은 눈을 감자 다시금 서봉각 안을 맴돌던 마귀 같은 비웃음 소리가 귓가를 찌르는 듯했다.
"이봐 꼬마 형제, 그만 뛰고 이리 좀 와봐. 덥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얼음 수레를 따라가는 그녀를 보고 길가의 냉차 노점상이 잽싸게 틈을 파고들어 호객 행위를 했다. "빙설완자 한 사발 시원하게 들이켜 보라고. 신선이 따로 없을 테니!"
아향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노점상에서 파는 '빙설완자'를 쳐다보았다. 찹쌀콩가루를 굴린 작은 경단이 영롱하게 빛을 발했고 그 위로 알록달록한 과일과 박하 잎이 곁들여져 후덥지근한 밤공기 속에서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꿀꺽 침을 삼켰다.
가게 주인이 그녀의 마음이 동한 것을 놓치지 않고 부추겼다. "한 그릇 맛만 봐, 맛만. 더위도 식히고 위장도 상하지 않으니 몸에 좋거든!"
원래 고개를 내저으려던 아향은 '위장이 상하지 않는다'라는 말에 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한 그릇에 얼마예요?"
잠시 후, 그녀는 빙설완자가 가득 담긴 항아리를 품에 안고 다시 즐거워졌다. 마음씨 좋은 주인이 노인에게 대접할 거란 사연을 듣고는 효심이 갸륵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더니, 아예 사기 항아리에 가득 담아주며 다 먹고 난 뒤에 그릇만 가져다 달라고 인심을 쓴 덕분이었다.
이토록 어여쁜 빙설완자가 그 쓸모없는 오리 머리보다 훨씬 향긋하지 않은가?
속으로 생각했다. 훗날 돈을 긁어모으면 서봉각을 통째로 빌려서 온전한 오리 백 마리를 시켜놓고, 고기는 죄다 밖으로 던져 개먹이로 주리라.
아향은 잘게 부순 얼음이 녹을세라 항아리를 안고 내달렸다.
그녀는 동성의 번화가를 가로지르며 그 사이를 오가는 마차들을 날렵하게 피하고 긴 다리를 뻗어 도로 공사로 파인 구덩이를 훌쩍 뛰어넘었다. 길가에서 꽃을 파는 아가씨를 향해 장난스레 휘파람을 불어 젖히기도 했다. 아가씨가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침을 뱉었지만 옷자락조차 맞히지 못했다. 아향은 이미 남성문을 빠져나간 뒤였다.
남문 밖은 여전히 악취가 진동했다. 잡곡전병을 파는 노점상이 가판을 걷을 채비를 하며 한 닢에 세 장으로 떨이를 치고 있었다.
"아저씨, 오늘은 안 사요!" 아향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오늘은 좋은 거 먹을 거거든요!"
그녀는정말 잘도 달렸다. 마치 한 마리 야생마처럼 숨 한 번 고르지 않고 단숨에 공장 지대로 내리 달렸다. 서늘한 사기 항아리 겉면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아향이 젖은 손을 옷자락에 닦으려는데 문득 공장 지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많은 인파가 에워싸고 있었는데…… 저마다 허리에 칼을 찬 관병들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이내 소란이 일더니 관병들이 몇몇 사람을 발길질하고 호통을 치며 질질 끌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 아향의 눈에 익은 얼굴들이었다. 그녀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막 다가서려던 찰나, 누군가 옆에서 그녀를 확 잡아챘다. 평소 할아버지와 어울려 금반채를 사러 다니던 함어백이었다. 보통 사람보다 몇 배는 커다란 눈을 가진 함어백은 금방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듯 부릅뜨고는 아향을 옆으로 끌며 낮게 속삭였다. "가지 마라!"
아향이 다급히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로 잡아가는 건데요?"
"남성문 밖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던 작자들이 조정을 모욕하는 역도 무리라며, 지금 공장 지대를 돌며 수색하는 중이다…… 얘, 너도 따라나선 적 있지 않으냐?"
이제 겨우 반쯤 큰 아이에 불과한 아향은 입으로만 위세를 부릴 줄 알았지, 막상 그 소리를 듣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손이 얼음 항아리보다 더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녀는 두 명의 병졸이 공장 지대 안에서 누군가를 질질 끌고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할아버지였다!
앓아누워 있던 노인은 키 크고 덩치 큰 두 관군에게 양쪽에서 덜미를 잡힌 채 두 다리가 맥없이 땅에 질질 끌려가는 꼴이 마치 숨이 턱에 닿은 늙은 개 같았다.
함어백 역시 그 광경을 목도하고는 연신 중얼거렸다. "아이고, 큰일 났네! 큰일 났어…… 어허, 어딜 가려고!"
막 뛰쳐나가려던 아향을 함어백이 한 손으로 낚아챘다. "우리 할아버지예요! 우리 할아버지는 안 갔다고요! 억울해요!"
"관원 나리들이 사람 잡아가는 데 억울하고 자시고를 따질 성싶으냐, 입 다물고 얌전히 있어라!" 함어백이 소녀를 붙들었다. "이러다 너까지 잡혀 들어갈 게다!"
또 다른 관병 무리가 그들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본 함어백은 기겁하여 두말없이 자신과 아향을 건초 더미 속에 쑤셔 넣었다.
성방 관병들의 장화가 남교 공장 지대의 질척한 땅을 짓밟고 지나갔다.
유성이 빗방울처럼 쏟아져 내렸다.
"대인." 아전 하나가 경조윤* 앞으로 달려와 뜨거운 땀을 훔치며 고했다. "남성문 밖에 무리를 지어 소란을 일으키고 '등운교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며 유언비어를 퍼뜨린 불량한 백성 육십여 명을 포박하였습니다. 모두 하옥하여 문초를 기다리고 있사온데, 대인께서는……"
"기다리긴 누굴 기다려? 네놈들이 당장 문초하지 않고!" 경조윤이 신경질적으로 눈꺼풀을 들었다. "누구의 사주를 받고 조정을 능멸했는지 토설케 하라! 불지 않거든 죽도록 패라! 오늘 성상**께서 어전에서 어필을 내던지시며 우리에게 배후의 주모자를 색출하라 어명하셨단 말이다! 오늘 당장 주모자의 목을 바치지 못하면 내일 아침엔 우리의 목을 내야 하거늘 빨리 안 가고 무엇 하느냐!"
*경조윤(京兆尹): 수도의 행정과 치안을 총괄하는 관직.
**천자, 황제를 높여 부르는 존칭.
아전이 허겁지겁 달려가자 깜짝 놀란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그 불길한 새는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끔찍한 소리로 '까악까악' 대며 능양하 서쪽을 향해 날아갔다.
장왕부의 검은 고양이는 날아가는 새를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빤히 노려보더니 흥분해서 엉덩이를 씰룩이며 금방이라도 덮칠 기세를 보였으나, 도중에 등덜미를 움켜쥐는 차가운 손에 저지당하고 말았다.
"잘 좀 지켜봐. 저 녀석이 함부로 들짐승을 물어오지 못하게. 불결하다." 장왕이 고양이를 백령의 품에 안겨 주며 반쯤 농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남성문 밖에서 사람을 사서 억울함을 호소하게 만들다니, 그 손 대인이란 자도 참…… 하, 차를 준비해라. 입궁하여 태자에게 선처를 구해야겠구나. 참, 오늘 지척으로 온 서신이 있던가?"
백령이 대답했다. "아직 없습니다."
"매일 안부를 전하기로 약속해놓고 며칠 지났다고 즐거워져 고향을 잊었나 보군.*" 장왕은 사람들의 시중을 받으며 조복으로 갈아입었다. "양심 없는 놈."
*낙불사촉(樂不思蜀): 촉한의 후주 유선이 위나라에 항복한 뒤 편안한 생활에 빠져 고향 촉을 그리워하지 않았다는 고사. 즐거움에 빠져 돌아올 줄 모른다는 뜻의 성어.
그 양심 없는 놈 해평은 문이 잠기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구자원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선 그는 기절해 있는 반우를 구석에 내팽개치고는 혹시나 '살아남은' 영석이 있을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영석은커녕 이 망할 반우는 '영석 가루' 한 톨조차 남겨두지 않았다.
해평은 공연히 헛수고만 한 탓에 반우가 더욱 미워졌다.
그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반우에게 따지려고 하려는 찰나, 그 잠깐 사이에 반우의 키가 뜬금없이 한 뼘 넘게 훌쩍 자라 작은 저고리와 바지가 팽팽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너무 급격히 자란 탓인지 반우의 몸속에서는 뼈인지 도월금인지 모를 것들이 '삐걱삐걱'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틀렸고 두 발이 쉴 새 없이 경련을 일으켰다.
해평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만져보니 옷깃 너머로 반우의 몸 안에 고속으로 돌아가는 증기 기관차라도 들어앉은 양 '덜덜덜' 진동이 전해져 왔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좋아, 이번엔 혼내주기는커녕 감히 손을 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이러다 진짜 터져버리면." 해평은 속으로 애가 타기 시작했다. "내 영석 한 상자만 허공에 날린 셈이잖아?"
그는 잠시 궁리하다 얼굴을 찡그리며 제 손가락을 찔러서 피 한 방울을 인색하게 짜내어 순룡쇄에 묻혔다. 핏방울이 순식간에 순룡쇄 안으로 스며들자 해평은 다시금 꼬리가 하나 더 생긴 듯한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그제야 꽤 불안한 마음으로 세수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한쪽 눈은 뜨고 '지켜봐야' 했다. 행여 한밤중에 '꼬리'에 무슨 이상이라도 생기면 즉시 알아차려야 하니까.
순룡쇄가 주인의 피를 빨아들이자 차갑던 금박편이 서서히 온기를 띠며 반우의 목을 조이지도 느슨하지도 않게 감쌌다.
해평이 등불을 끄자 짙은 어둠 속에서 반우가 핏발 선 눈을 번쩍 떴다. 눈동자가 힘겹게 구르더니 침실 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단지 몸을 움직일 수 없었을 뿐, 사실 줄곧 깨어 있었다.
반우는 어렴풋이나마 기억이란 게 생긴 이래로 줄곧 사람도 귀신도 아닌 이 괴물 같은 꼴이었다. 옛 주인은 그에게 단 한 번도 영석을 먹인 적이 없었고, 매달 청광 세 돈을 가루 내어 물에 타 먹이는 것으로 겨우 목숨만 부지하게 했다. 그 탓에 키가 자라지도, 영지가 트이지도 못해 흐리멍덩한 채 머릿속은 온통 허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해야만 그의 영감이 각별히 예민해져서 주인을 위해 영기가 풍부한 곳을 손쉽게 찾아내는 충실한 '영견' 노릇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주인이 술에 취해 주머니에 들어있던 벽장석 두 냥을 미처 간수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지독한 허기에 눈이 뒤집힌 반우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그 벽장석 두 냥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술에서 깬 주인은 불같이 화를 내며 그 자리에서 그의 경맥을 산산조각 내고 뼈에 새겨진 법진을 난도질한 뒤, 가슴과 배를 갈라 그 벽장석 두 덩이를 끄집어냈다. 차가운 칼날이 살갗을 베어내고 투박한 손아귀가 오장육부를 헤집어놓았다.
주인은 그에게 확실한 '기억'을 심어주기 위해 가죽이 벗겨진 채 뼈와 살이 드러난 그를 찌는 듯한 한여름 뙤약볕 아래 사흘 밤낮을 내버려 두었다…… 이렇게 짓이겨져도 죽지 않는 괴물이거늘, 어찌하여 고통만은 혈육을 지닌 몸과 똑같이 느껴지는 것일까?
다행히 반우는 영지가 온전하지 않아서 미쳐버리는 것조차 할 줄 몰랐다.
그날 이후, 그는 확실한 기억을 새겨넣었다. '벽장청' 빛깔만 보아도 간담이 서늘해졌고 덩달아 강남의 푸르른 봄빛마저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이든 짐승이든 아귀가 되면 죽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지는 법이었다. 옛 주인이 억지로 그에게서 벽장석을 '끊게' 만들긴 했으나 남옥에 대한 공포까지 가르치진 못했다.
자물쇠조차 채워지지 않은 남옥 한 상자를 마주한 반우는 끝내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같은 과오를 되풀이했다.
해평에게 들려 징정당으로 향할 때, 반우는 개나 고양이보다 나을 것 없는 영지로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큰 화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았다. 이번에는 정말로 끝장이 날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후회라는 감정을 알지 못했다.
그저 먹기 위해 숨통을 이어왔을 뿐이었다. 배불리 먹었으니 이제 갈가리 찢겨도 좋았다.
그런데…… 왜 갈기갈기 찢기지 않은 걸까?
남옥에 응축되어 있던 막대한 영기가 수년 동안 멈춰 있던 반우의 몸을 씻어 내렸고 엉성하게 땜질되어 있던 전신의 법진이 구석구석 생기를 머금었다. 반우의 육체와 영지는 봄비를 맞은 죽순처럼 빠르게 자라났다. 허물을 벗고 나오듯 몸집이 커지면서 마음속에 흐렸던 것들이 홀연 선명해졌다. 기력을 되찾아 눈을 떴을 때, 반우는 자초지종을 온전히 깨달았다. 누군가 무려 남옥 백 냥을 포기하고, 한 푼어치 값도 없는 이 더러운 목숨을 남겨준 것이다.
천지개벽하듯 뒤바뀌는 골육이 촌촌이 찢겨나갔고, 채 아물기도 전에 다시 찢어졌다…… 살고 싶어도 살 수 없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반우는 온몸을 떨며 기형의 혀를 또 한 마디 깨물어 입안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는 이미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살기를 구했다. 이 목숨은 이제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다.
마지막 유성이 지나가고 별하늘이 다시 고요에 잠겼다. 이 하룻밤, 꿈길은 쓸쓸했고 곳곳에 잠들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다.
금평의 남성문 밖, 아향은 자신의 집으로 뛰어들었다. 함어백이 대신 연줄을 찾아 성방 관병 한두 명을 매수해 먼저 사람을 빼낼 수 있을지 알아본다고 했다. 아향의 할아버지는 며칠 동안 병이 나 문을 나선 적이 없었고 공장 구역의 돌팔이 의사도 증언할 수 있었다. 그들이 잡아야 할 사람은 그녀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무엇으로 매수를 할 것인가?
아향은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작은 판잣집을 샅샅이 뒤졌다. 조손이 반 달 동안 잡곡전병을 먹기에 간신히 족할 동전 한 줄을 제외하면, 집에는 오직 기한이 지난 '금반채' 더미만 남아 있었다. 폐지표 위에는 금은보화와 상서로운 구름, 오색 봉황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었다. 서른한 장, 그 매 한 장이 모두 산산조각난 꿈이었다.
할아버지는 기한이 지난 금반채를 종이 원보*로 접어 소박한 향안 위에 올렸는데, 신위에는 신상 없이 빈 '평안무사패'만 덩그러니 있었다. 듣자 하니 '태세성군'의 신패라고 했다. 성군의 내력은 그도 분명히 말하지 못했고 어디서 들은 건지 다른 사람들을 따라 믿으며 매번 금반채를 사기 전에 경건하게 와서 절을 했지만, 어쩌면 이 태세성군은 재물신을 겸임하지 않는지 한 번도 영험을 보인 적이 없었다.
*원보(紙元寶): 배 모양 금은 주괴, 옛날 중국의 화폐.
아향은 기진맥진하고 갈 길이 막막했다. 귀신에 홀린 듯 그녀 역시 태세성군에게 원보 하나를 접어 올리며 몹시 급한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신패를 향해 기도했다.
날이 너무 더워 열이 올랐던 아향이 이렇게 고개를 숙이자 코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아향은 허둥지둥 '신패'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두서없이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 좀 구해주세요, 태세 대인. 제발 할아버지를 구해주세요. 할아버지를 구할 수만 있다면 제 목숨이라도 드릴게요……."
신패는 무슨 특별한 나무인지 솜처럼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흐르는 피를 한 방울 한 방울 탐욕스럽게 빨아들였다.
방전은 성큼성큼 천기각 총서로 들어서며 부하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그 사수들의 나무패가 어떻게 됐다고?"
"도통, 보십시오." 그 남의는 사수의 몸에서 압수한 전생목*패를 꺼내 보였다. 창백한 나무패 위에 핏자국이 얼룩덜룩해 누군가 나무패 안의 악귀 원혼을 깨운 것 같았다. "방금 남쪽 하늘에서 별이 떨어질 때 갑자기 이렇게 되었습니다."
*전생(轉生): 다른 것으로 다시 태어남, 환생.
대형 증기화물선이 굉음을 내며 부두를 떠나 악취 나는 거대한 파도를 일으켰다. 운하 가에서 먹이를 찾던 파리 한 마리가 파도에 휘말려 들어갔다.
마침 등대에서 훑어 내린 빛줄기 하나가 푸르스름하게 번들거리는 수면 위로 떨어져, 죽어가며 발버둥 치는 작은 벌레의 몸에서 굴절되어 나가 희박한 물안개를 꿰뚫었다.
잠수사 안의 해평은 미간을 찌푸린 채 몸을 뒤척이며 매우 불안정하게 잤다. 귓가에는 '윙윙'거리는 사람 목소리가 가득 찼다.
누군가 그에게 '할아버지'를 구해달라고 빌었고, 누군가는 목놓아 크게 울었으며 누군가는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소음 속에서 그는 옆방의 반우가 깨어나 눈을 뜨고 일어나 침실로 들어오는 '꿈'을 꾼 것도 같았다.
짜증 나 죽겠네. 해평은 이불로 머리를 감쌌다.
반우는 소리 없이 해평의 침실로 들어왔다. 이 사람이 꿈속에서 무슨 무술이라도 한 건지 온몸을 밖으로 드러낸 채 이불을 가슴 위로 말아 올려 놓고 있었다. 크게 마음을 잘못 먹고 비단 이불로 목을 맬 듯한 뜻이 있어 보였다.
침대 옆에 웅크리고 앉아 해평을 잠시 바라본 반우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를 이불 속에서 꺼내 주려 했다.
갑자기 반우가 흠칫 놀라며 뒤로 크게 한 걸음 물러나 깡마른 등을 활처럼 세웠다.
방금 전까지 죽은 개처럼 자던 해평이 느닷없이 시체 벌떡 일어나듯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는 느릿느릿 목에 감긴 비단 이불을 풀었다. 눈빛은 한 번도 잠든 적 없었던 것처럼 맑았다. 시선을 들어 반우를 똑바로 마주보더니 이내 기이하게 웃었다.
반우의 솜털이 곤두섰다.
'해평'은 천천히 목을 비틀어 옷깃과 자다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하고 양손을 눈앞으로 들어 올려 매우 아끼는 듯 어루만지며 살펴보더니 탄식했다. "참으로 호의호식하며 자란 좋은 손이구나."
분명 해평의 목소리였지만 발성 위치가 그가 평소 말할 때와 크게 달라서 도무지 같은 사람 같지 않았다. 낮게 깔린 말소리에 희미하게 영안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
'해평'이 일어나 몇 걸음 걷더니 손을 뻗었다. 반우는 보이지 않는 밧줄에 매달린 것처럼 허공으로 떠올라 그의 시선과 평행을 이루었다.
"꼬마야." '해평'이 그를 잠시 자세히 살펴보더니 웃었다. "너는 이번 생에 사람이 될 기회가 없으니, 사람 흉내 내며 잔꾀를 부리지 마라, 응? 무엇을 말해야 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아야 하는지 아느냐?"
반우가 입을 벌리자 기형의 입술과 이가 드러났다.
"오, 소리를 못 내는구나. 참 잘된 일이다." '해평'의 차가운 손가락이 반우의 입술을 따라 아래로 미끄러졌다. 반우가 세차게 몸을 떨었다. 그 손가락은 반우의 몸에 법진이 새겨진 곳을 정확히 스쳐 지나갔다. 그 옛날 그의 가슴과 배를 갈랐던 칼보다 날카롭고 차가웠다.
"입이 가벼운 인형은 장작으로 쪼개져 아궁이 구덩이에 채워져 타버리게 된단다." '해평'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자신의 입술에 댔다. "쉿——"
말을 마치고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매달려 있던 반우는 무겁게 밀쳐진 듯 비틀거리며 서재로 날아갔다.
'해평'은 돌아서서 집 뒤에 있는 작은 마당으로 향하더니 손을 휘둘러 금제를 치고 계수나무 아래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창백한 달빛이 구름 그림자에 밀려 지면을 휩쓸고 지나갔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금제를 뚫고 '해평'의 몸 위에 떨어져 그의 그림자를 비췄다.
그 그림자는 사람 형상이 아닌, 칠흑 같은 용이었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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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장부터는 아래 글 참고하셔서 비밀번호 문의 주시면 됩니다! 즐거운 감상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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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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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est <태세> | 제19장 龙咬尾(七)꼬리를 문 용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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